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휘청하던 1997년 말. 저녁 술자리에서 만난 모 기업체 중견간부의 건강 상태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홍보업무를 지휘하던 40대의 그는 간 경화 진단을 받은 상태였는데도 입원 중이던 병원을 빠져 나와 술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홍보 업무를 책임지는 사람이 아프다고 술자리를 빼먹을 수 있나요.”
궁지에 몰린 회사를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수액 바늘을 뽑아 버린 채 밤의 전투에 자진 참전했다는 소리에 참석자 대부분이 박수로 화답했던 기억이 새롭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고위 공무원은 얼마 전 암 발병 판정을 받았다. 일 잘하고 인간관계가 좋기로 유명한 ‘100점짜리’ 공무원이었기에 비보는 여러 사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지인들은 암 발병 소식이 알려지기 직전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 그가 평소처럼 활달하게 술잔을 돌렸으되 표정은 어두웠던 이유를 자신은 암 발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왜 남자는 술에 관한한 이렇게 무모한 것일까?
최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30세 이상 남성의 칼로리 공급원 2위가 다름 아닌 소주였다. 쌀밥 다음으로 많이 먹는 영양분 공급원이 술이라는 얘기다.
전문의들은 한국 남자가 폭음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조직문화를 왜곡적으로 체득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대부분의 남자가 군대에서 술을 빨리 많이 마시는 것을 배우고, 이때 동료에 뒤쳐지면 사내답지 못하다는 구박을 받았으며, 이것이 몸에 익어 직장생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술자리를 경쟁의 연장선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자에게 술자리는 원초적인 힘겨루기의 장으로 작용한다. 현대사회의 각종 규범과 위계에 눌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남자의 ‘결투’ 본능은 술로라도 반드시 상대를 거꾸러뜨리고 싶다는 욕구를 부른다.
남궁기 연세의료원 정신과 교수는 “심리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성성을 과시하고 서로의 강함을 비교하고 싶은 욕구가 폭음의 원인이 된다”며 “상대보다 멀쩡한 아침을 맞이하면 더욱 능력이 있어보인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한 것도 남성 폭음자들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래저래 무모한 남성의 본능이 평균수명을 깎아 먹기는 매머드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였던 석기시대나 폭탄주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보다 이성적인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을 앞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