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난주 광주에서 열린 5ㆍ18기념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다른 지역도 아닌 광주에 와서 활보하기 전에 그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광주시민들이 분명히 짚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선 주자' 이명박씨와 한나라당에 대한 광주 유권자들의 지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무덤덤함)에 편찮은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빈곤한 역사의식'이란,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 세력이 빈둥빈둥 놀았다"고 이명박씨가 어느 자리에서 비아냥거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명박씨 역시 그 날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 장관감도 못 되는 이명박?
정동영씨는 3월에도 광주의 한 강연에서 한나라당 대선 주자를 호남 유권자들이 지지하는 것이 "통탄스럽다"며, "광주가 수구세력과 손 잡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명박씨를 "장관도 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깎아 내리기도 했다. 자신에겐 장관 경력이 있다는 걸 넌지시 내세우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누구든 이명박씨에 대해 제 나름의 평가를 내릴 수는 있겠고, 개인사나 역사의 공과에 무덤덤해지는 민심을 '통탄'할 수도 있겠다.
'통탄'까지 할 열정은 없으나, 나도 정동영씨와 생각이 비슷하다. 보여준 것이라곤 개발지상주의적 뚝심과 미숙한 말버릇밖에 없는 이에게 쏠리는 민심이, 그게 어느 지역 민심이든, 흐뭇하진 않다.
그런데 '다른 지역도 아닌 광주와 호남' 민심이 '다른 당도 아닌 한나라당' 후보에게 부드러워져가는 것을 정동영씨가 고까워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정동영씨'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는 게 거북하다.
정동영씨는 네 해 전 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이 당의 법적 우두머리 노릇을 했고, 당내 최대 계파를 이끌었다. '지역주의 정당' 민주당을 쪼개 우리당을 만든 이들의 핵심적 정치 프로그램은, "영남표 반을 얻기 위해 호남표 반을 버리는 것"이었다.
정치적 이해가 엇갈려 이젠 소원해진 옛 창당 동지들에게 이 비윤리적 프로그램의 책임을 떠넘기고 제 손은 깨끗하다고 발뺌할 만큼 정동영씨의 사람됨이 추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당 프로그램에 따르면, 한나라당이 호남 유권자 반을 얻고 우리당이 영남 유권자 반을 얻으면 지역주의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한나라당에 대한 호남의 지지가, 우리당을 만들며 정동영씨와 그 동지들이 세웠던 목표에 아직 다다른 것 같지는 않다. 또 그 지지가 얼마나 견고한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우리당 창당세력이 그리도 바라던 지역주의 해소가 바로 그들이 바라던 방식으로(기괴한 방식이긴 하나) 이뤄질 기미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정동영씨가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다. 이걸 두고 '통탄스럽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정동영씨가!
정동영씨 처지가 지금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호남 민심이 자신보다 이명박씨에게 더 호의적이라 해서 그가 이를 '통탄'하는 것은 야릇하다. 일을 이리 만든 첫 단추가 그가 주도한 분당이었고, 그가 기꺼이 버린 호남 민심 일부가 한나라당으로 가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이제 와서, 그가 분당의 책임을 대통령이나 소위 친노 세력에게 돌릴 수는 없을 게다. 대통령과 친노 세력에게 이용 당하고 버림받았다고 투덜댈 일도 아니다. 사실 그는 참여정부에서 누릴 만큼 누렸다. 그가 이명박씨를 두고 장관감도 못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우정에 찬 배려 덕분이다.
● 차라리 '대구사랑 모임'을
정동영씨는 며칠 전 자신의 홈페이지에다 "대통령은 영남에서 지지율이 오르면 지역감정이 해소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굴복"이라고 썼다. 옳든 그르든, 이것은 네 해 전에 했어야 할 말이다.
정동영씨가 우리당 창당정신을 계속 지켜가는 길은, 창당 초기에 그랬듯, '대구사랑 모임'을 성실히 이끄는 것이다. 통탄을 하든 징징거리든, 광주 말고 대구에 가서 하는 게 좋겠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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