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물류업체인 발렉스코리아 임직원들은 요즘 곤혹스럽다. 이 회사는 현금 거래가 많은 유통업체나 금융회사, 공사 등을 대상으로 매일 현금을 수거해주고 동전이나 지폐가 필요한 업체에 다시 공급하는 출장 수납 사업을 해왔는데, 최근 강력한 경쟁자를 만났다. 현금자동화기기 관리 사업을 하는 상장 기업인 한국전자금융이 지난해부터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문제는 한국전자금융이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의 신용등급을 매기는 한국신용정보(NICE)의 자회사라는 점이다. 발렉스코리아 측은 최근 "한국전자금융의 거래 제안서를 받은 업체 상당수가 '거래 제안을 거절할 경우 기업 신용평가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 아니냐'며 자사와의 계약을 주저하고 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금융감독원에 제출했다.
회사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 신용평가 등급 하나에 수십 억, 수백 억이 좌우된다"며 "신용평가회사가 자회사를 통해 불공정한 영업을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기업 신용을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회사들의 업무 영역 확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해 상충의 소지가 있어 거래 고객에게 상당한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공정 경쟁을 해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높기 때문이다.
23일 금감원에 따르면 국내 기업신용평가 시장은 10년 전인 1997년 100억원에서 지난해 575억원 규모로 급팽창하고 있지만 한국신용정보,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3개사가 시장의 98%를 차지하는 등 과점 체제는 더 심화하는 추세다.
더구나 신용평가사들은 자회사 등을 통해 본연의 업무인 기업신용평가 외에 다양한 영역으로 업무를 넓히고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기업이나 금융회사의 고객센터(콜센터)를 구축해주는 KIS네트웍스 등 5개 관계회사를, 한국기업평가는 기업 컨설팅 업체인 eValue 등 5개 자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신용정보도 한국전자금융 등 4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신용평가사의 자회사를 통한 업무 영역 확대는 모회사인 신용평가사의 공정하고 투명한 평가 업무와 상충될 소지가 다분하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신용평가사들이 다양한 업무 영역에서 기존 업체들과 경쟁을 할 경우, 고객 기업 입장에서는 평가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신용평가사의 도덕성에만 의존하기 보다는 제도적 차단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당 업체나 금융감독 당국은 문제의 소지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전자금융 관계자는 "자회사의 영업이 모회사의 신용평가 업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며 "모회사 내에서도 신용평가 업무 영역은 완전히 분리돼 있으며, 더구나 상장 회사가 비도덕적 영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금감원 측은 "신용평가사들이 자회사의 업무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며 "그러나 모회사의 지위를 이용해 강압적인 영업을 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