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1> 리스본 - 테주江의 파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1> 리스본 - 테주江의 파두

입력
2007.05.22 23:31
0 0

마드리드의 차마르틴역에서 시인과 변호사와 나는 철학자와 헤어졌다. 철학자는 북쪽으로 길을 잡아 프랑스의 보르도를 거쳐 파리로 갈 예정이었고, 나와 다른 두 친구는 남서쪽 포르투갈 쪽으로 행로를 잡아 리스본에 들른 뒤 파리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파리에선 화가 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이나 사흘 뒤면 다시 보게 될 터였지만, 시인과 변호사는 차마르틴역에서 철학자와 작별의 포옹을 했다. 나는, 남자끼리의 포옹을 망측하게 여기는 보수적 한국인이어서, 눈빛과 제스처로 포옹을 대신했다.

그보다 11년 전에 그랬듯 이때도 나를 리스본으로 날라다 준 것은 밤기차였다. 그러나 2004년과 달리 1993년에는 출발지가 세비야였다. 세비야를 떠난 기차는 새벽 두 시쯤 포르투갈 국경의 한 스페인 역(그 황량했던 역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에 나를 내려놓았고, 나는 거기서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려 리스본행 열차를 탔다.

세비야에서 리스본까지는 직행 열차가 없었다. 환승의 불편함도 불편함이었지만, 침대칸에 몸을 눕힌 2004년 11월과 달리 93년 5월 리스본 초행길엔 일반 좌석에 앉아 밤을 지새워야 했다. 게다가 피에 굶주린 모기들이 객실을 떠돌며 구겨진 내 몸을 사납게 탐했던 터라, 리스본의 산타 아폴로니아역에 내렸을 땐 온몸이 찌뿌드드했었다.

산타 아폴로니아역도 그대로였고, 그 앞의 테주강(스페인어로 타호강)도 그대로였다. 11년 저편의 봄날 아침 이 강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것이 바다라고, 대서양이라고 생각했다. 전혀 터무니없는 짐작은 아니었으나, 옳은 판단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산타 아폴로니아역 앞에 널따랗게 펼쳐진 물의 벌판은 테주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하구(河口)다. 이틀 전 아랑후에스에서 본 타호강은 조붓한 개울에 가까웠는데, 지금 리스본에서 보는 테주강은 바다에 가깝다.

산타 아폴로니아역은 리스본시의 가장 낮은 지대에 속한다. 리스본엔 언덕이 많아 곳곳이 경사다. 그리고 그 경사들은 흔히, 서울의 북악산 기슭동네나 남산 기슭동네를 연상시킬 만큼 가파르다.

93년 5월 나는 여행가방을 들고 그 가파른 비탈길들을 걷고 걸어 마리아 d. R. H.라는 친구 집을 찾아갔다. 마리아의 집은 시내의 바이루 알투(‘높은 구역’이라는 뜻이라 한다) 구역에 있었다. 좋이 한 시간 너머는 걸었던 것 같다. 택시를 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혼자였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 때도 나는 교통비로 쓰는 돈이 아까웠다. 아깝지 않은 것은 그저 먹고 마시는 데 들이는 돈뿐이었다.

마리아는 파리의 언론인센터를 거점으로 삼은,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나와 함께 참석하고 있던 서른네 명의 기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리스본의 <인데펜덴테> 라는 일간지에 적(籍)을 두고 있었다.

마리아가 제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내가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베리아반도의 관광산업을 취재하고 있었듯, 그녀도 유럽 어딘가로 가서 무언가를 취재하고 있었다. 마리아의 집에서는, 역시 같은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던 폴란드 친구 로만 G.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맡은 주제는 나와 달랐으나, 그도 리스본에서 뭔가를 취재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제 고향에서 며칠을 보낼 동료 기자들의 숙박비를 아껴주기 위해 기꺼이 제 집 열쇠를 우리에게 건넸던 것이다. 마리아는 독신이었으므로, 로만과 나는 그 집 주인 노릇을 하며 편하게 지냈다.

로만과 나는 마리아의 집에서 나흘을 같이 보냈는데, 우리들의 동거는 유쾌하게 시작해서 씁쓸하게 끝났다. 로만은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의 동료들 가운데 나와 한동안 단짝처럼 지내던 친구였다.

리스본에서 같이 지내게 된 것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바르샤바의 일간신문 <쿠리에르 폴스키> 기자였던 로만은 저와 첫 이름이 같은 동포 시네아스트 로만 폴란스키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내 폴란드 동료기자의 성도 ‘-스키’로 끝난다. 그래서 그 이름은 처음 듣는 즉시 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그 프로그램의 동료 기자 서른네 명의 이름과 성을 모두 외는 데 한 달도 더 걸린 것 같다.) 20대 후반, 30대 초 기자들이 다수였던 그 프로그램에서 로만과 나는 나이도 서른네 살로 동갑이었다.

우리는 낮엔 리스본 시내를 취재 반 놀이 반 쏘다녔고(내가 맡은 주제가 관광산업이었으니, 내가 관광객으로서 리스본 거리를 거닌 것은 ‘직업적으로도’ 매우 정당했다!), 밤이면 마리아의 집 거실에서 술과 음악으로 몸뚱어리를 적셨다.

그런데 내가 리스본을 떠나던 날(로만은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리스본에 더 머물 예정이었다) 우리는 심하?다퉜고(사실 다퉜다기보다는 내가 그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신경질을 부렸고), 파리로 돌아와서도 우리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그 서먹서먹함이 끝내 가시지 않았다.

로만의 영어는 내 프랑스어보다 훨씬 더 서툴렀기 때문에 우리는 늘 프랑스어로만 얘기했는데, 화가 나니 내 입에서 (프랑스어보다는 그나마 편한) 영어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로만은 프랑스어로 대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기괴한 장면이었다.

다툼은 로만이 슬그머니 마리아의 험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시작됐다. 그러나 그 얘기는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낫겠다.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고 그는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로만에게는 대단히 억울할 결론으로 이어질 게 뻔하니 말이다. 아무튼, 로만과 함께한 리스본의 마지막 날은 우울했다.

그래도 리스본은 정겨운 도시였다. 산타 아폴로니아역에서 시내 쪽으로 뻗은 언덕길들의 허름한 건물들은 설핏 내 어린 시절 서울 풍경을 연상시켰다. 유럽대륙 가장 서쪽에 자리잡은 수도인 리스본은 그 때까지 내가 봐왔던 유럽의 수도들 가운데 가난의 냄새가 가장 짙게 드리워진 도시이기도 했다.

마리아의 집 근처 상 페드루 데 알칸타라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리스본은 불긋불긋한 지붕들을 기하학적 무질서 속에서 바드름하게 벌여놓고 있었다. 그 풍경은 몽마르트르의 사크레-쾨르 성당 앞에서 내려다보는 파리보다 확실히 소박했다. 그러나 60년대의 소박한 수도에서 자란 한국인의 눈에는 그만큼 덜 스스럽기도 했다.

이리 말하는 것도 사실은 주제넘은 일이다. 리스본은, 거기 얽힌 지배욕과 자기확장 충동의 정당성 여부를 괄호 안에 묶는다면, 한 때 대서양 양안을 호령하던 해양대국의 수도였다.

거의 5세기의 시차를 두고 테주강가에 들어선 벨렘탑과 ‘발견의 기념비’는 흔히 ‘대항해’ 또는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부르는 유럽인들의 장정(長征)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맡았던 선도적 역할의 상징물이다. 바스코 다 가마도 이 테주강에서 인도양 횡단의 돛을 올렸다.

11년 뒤 가을날 아침에 다시 찾은 리스본에서, 나는 여행가방을 든 채 비탈길을 오를 필요도 없었고, 미안한 마음으로 동료 집에 신세질 필요도 없었다. 시인과 변호사와 나는 산타 아폴로니아역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미리 예약해 둔 주리케 호텔로 갔다. (‘주리케’는 스위스 도시 ‘취리히’의 포르투갈어식 이름이라 한다.)

시간이 일러 입실이 안 된다기에 우리는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나와 호텔 둘레의 ‘공화국 거리’를 이리저리 해찰하며 걸었다. 11월의 리스본 거리는 그 옛날 5월의 리스본 거리만큼 다사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소박한 도시는 여전히 정겨웠다.

제가끔 방에 짐을 풀고 빨래를 하고 다리를 주물러 피로를 푼 뒤, 우리는 포르투갈 대중음악의 정수를 찾아 나섰다. 파두 말이다. 두 친구와 나는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타고 알파마 구역의 파두박물관(정식 이름은 ‘파두와 포르투갈 기타의 집’)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우리를 박물관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다. 택시가 더 들어갈 수 없다며(알고 보니 그것은 거짓이었다) 알파마 구역의 한 비탈길에 우리를 내려놓았는데, 인적이 드문 낯선 곳에 남겨진 우리는 좀 당황했다. 그 당황 속에서 우리는 택시기사의 행태를 두고 이런 저런 상상을 했다.

그가 파두박물관이 어디인지 모르는 초짜 택시기사여서 무책임하게 그 근처 아무데나 승객을 내려놓은 것일까? 아니면 외국인들을 곯려주려는 악의로 그런 것일까? 그 악의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저 아시아인이 리스본에서 ‘설치는’ 게 싫었을까?

두 친구와 나는 택시 안에서 줄곧 포르투갈의 옛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1889~1970) 얘기를 했는데, 그것이 택시기사의 적의를 촉발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국어로 얘길 나눴지만, 살라자르라는 이름은 그의 귀에 또렷이 들렸을 테다. 대부분의 포르투갈 사람들처럼, 우리의 택시기사 양반도 40년 가까이 제 나라를 철권으로 다스린 살라자르의 추종자이거나 비판자일 것이다.

그가 추종자라면 우리가 살라자르 험담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적의를 품었을 수도 있고, 그가 비판자라면 우리가 살라자르를 상찬하는 것으로 여기고 적의를 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알 길은 없었다.

‘파두의 집’을 찾느라 좀 애를 먹긴 했으나, 그 덕분에 우리는 알파마 구역의 뒷골목들을 대강이라도 살필 수 있었다. 알파마는 리스본의 가장 오래된 구역이다. 거의 유일하게 중세 리스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1755년의 대지진을 비롯해 리스본은 여러 차례 지진을 겪은 탓에 도시의 많은 구역이 옛 모습을 잃었지만, 테주강에 잇닿은 알파마 구역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다.

파두 박물관에서 우리는 이 나라 대중가요계를 쥐락펴락했던 파두 스타들의 흔적을 엿보았다. 그 스타들 중의 스타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1920~1999)였다. 그 여자를 위한 방이 아예 따로 하나 마련돼 있었다. 우리는 그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가 생전의 그녀 앞에 섰다. 아말리아의 생애를 담은 영상물이 그녀의 노래와 쉼 없이 버무려졌다. 그 목소리와 선율에 리스본 서민들의 애환이 있었다. 아말리아도 리스본 빈민가 출신이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오며 파두 스타들의 얼굴이 박힌 티셔츠를 하나씩 샀다. 그리고는 근처의 파두 카페로 가 이 서러운 ‘숙명의 노래’(‘파두’는 포르투갈어로 ‘숙명, 운명’이라는 뜻이라 한다)를 실연으로 들었다. 내 친구 둘은 실연을 마친 가수들의 CD를 여러 장 샀다. 그 노래들이 좋기도 했겠지만, 마음들이 여려서이기도 했을 게다.

호텔로 돌아올 땐 시내의 가로수들이 온통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 11월도 다 가지 않았는데, 리스본은 이미 크리스마스였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