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 출생/ 숭실고ㆍ연세대 법과 졸업/ 행정고시 합격(14회)/ 재무부 결산관리ㆍ외자관리ㆍ재정융자ㆍ총무과장/ 통계청 통계조사국장/ 재정경제부 공보관/ 코리안리 대표이사 사장(98년7월~)
간단히 정리된 나의 이력이다.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적지 않은 삶의 굴곡을 겪었다고 여겨 왔건만, 이력서만 보면 그런 고통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해방직전 태어나 한국전쟁과 4ㆍ19, 5ㆍ16 등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지만, 내 이력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다.
언론에서는 ‘성공한 낙하산 CEO'라고 하기도 하고, 지인들은 ‘타고난 CEO’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이를테면 “명문대학을 나와 행시에 합격하고 순탄한 공무원의 길을 걷다가 ‘낙하산’을 타고 금융회사 CEO가 되어 1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칭 성공한 인생”이라는 시각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에게도 시련과 고통스런 선택의 시기가 있었다. 이력서에는 드러나지 않는 몇번의 환골탈태가 나를 이곳까지 끌고 왔고, 또 지탱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그 도전과 변신을 얘기해 보기로 하자.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 겨울, 경남 창원의 해병대 상남보병훈련대. 스물셋의 나는 영육(靈肉)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 내고 있었다. 진해에서의 8주 신병훈련에 이어 지옥훈련이라 불리던 4주간의 보병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24시간 몸과 마음의 날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파병을 겨냥한 실전훈련이었다. 차라리 영하 15도 빙판을 깨고 들어가 앉아있는게 육상훈련보다 편했다. 내무생활도 실전의 연속. 몽둥이 찜질 없이 취침에 들면 불안했다. 한밤중에 비상이 걸려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속옷과 엉덩이가 피로 엉겨 붙어 엎드려 잔 적이 많았다.
연병장 위로 서늘한 겨울 달이 올라오면 삼삼오오 낮은 목소리로 전쟁과 죽음을 이야기했다. 참전을 전제로 해병에 자원했기에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실전이었다. 동기 750명 가운데 500명이 월남으로 떠났다.
“왜 하필 해병인가?” 대학 2학년 자원할 때부터 제대한지 38년이 지난 지금까지 받는 질문이다. 이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더 솔직히 말하면 “잘 나가는 부잣집 범생이가 왜 갑자기 해병에 자원했느냐?”는 뜻일 게다. 던지는 쪽의 호기심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답은 복잡하다. 그래서 웃음으로 넘긴 적이 많다.
솔직히 정답은 없다. 타군보다 복무기간이 3개월 정도 짧았고, 평소 운동을 즐긴 터라 두려움 보다는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호기가 앞섰을 수 있다. 피할 수 없다면 3년간 치열하게 부딪치고, 돌아와 새 각오로 고시에 전념하겠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그러나 해병이 되자 모든게 달라졌다. 미리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긍정적 시각,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등등. 공무원 시절에도, 그리고 CEO가 된 뒤에도 힘든 일이 닥칠 때 마다 나는 훈련시절을 떠 올린다. 그러면 두려움은 싹 가시고, 한번 부딪혀보자는 도전심리가 살아나게 된다.
코리안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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