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 투자 막는 간섭 반발
#. 2004년 7월. 우리나라 재계 1위 삼성이 대표적인 재벌규제 수단인 출자총액제한 대상에서 제외됐다. 순이익이 급증하면서 출총제 예외 기준인 ‘부채비율이 100% 미만’ 조항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듬해 예외 기준에서 부채비율을 삭제, 삼성을 출총제 대상에 다시 편입시켰다.
#. 한국경제연구원 최충규 박사는 1981~2004년 중 공정위가 내린 기업결합 사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분석했다. 결론은 공정위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확률이 67%에 달한다는 것.
기업결합 대상 기업의 주가가 공정위 판단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경우는 8건 중 3건에 불과했고, 나머지 5건은 거꾸로 움직였다.
위 두 사례는 우리나라 대기업을 옥죄는 규제의 실상을 말해준다. 행정당국이 임의대로 기준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 규제가 취해지고 있지만, 규제의 품질은 시장에서 인정 받지 않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규모가 크다고 규제를 강화하는 현행 재벌정책은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는 ‘우물안 규제’이며, 외국 거대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기업의 발목만 잡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재계의 원성이 가장 많은 ‘우물안 규제’는 출총제다. 기업 투자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기준이 수시로 바뀐다는 점이다. 금호, 한화, 두산그룹 등의 건설 계열사들은 특수목적회사(SPC)가 출총제 규제를 받아 대규모 건설사업 추진에 애로를 겪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출총제가 없어지면 14조원의 신규 투자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정위는 “출총제는 계열사 출자를 규제하는 것으로, 투자와는 상관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재계는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재반박하고 있다. 공정위 논리를 따른다면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건 출자일 뿐 투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정책당국의 예측 불가능성도 도마에 올라있다. 지난해 ‘지배구조 우수기업’으로 평가됐던 한진그룹과 현대중공업이 올해에는 ‘지배구조 우수기업’에서 탈락, 다시 출총제 규제를 받게됐다.
총수 지분이 줄어드는 등 지배구조가 나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계열사들이 이익을 많이 내는 바람에 ‘지배구조 우수기업’을 평가하는 괴리도(대주주 보유지분과 경영권 행사 지분과의 차이)와 의결권 승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정부가 순환출자 금지 등 기업지배구조에 개입하려는 것도 대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순환출자는 재벌의 나쁜 관행으로 알려졌지만, 선진국에서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독일 도이치방크 등의 계열사도 순환출자 형태로 연결돼 있다. 대만 1위 그룹인 포모사 플라스틱과 인도 1위인 타타그룹 등도 순환출자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또 소유ㆍ지배권의 괴리를 문제 삼지만, 전경련에 따르면 이탈리아 최대 기업집단인 아그넬리 가족기업의 의결권 승수는 8.86배에 이르고 있다.
독일 보쉬 가문의 다임러벤츠에 대한 의결권(25%)도 소유지분(1.56%)의 16배에 달하며, 스웨덴 발렌베리와 미국 포드 역시 보유 지분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숭실대 전삼현 교수는 “기업 소유구조를 사전적으로 규제하는 국가는 없다”며 “순환출자의 폐해로 알려진 가공(架空) 자본 현상은 해당 사항을 명확히 공시만 되면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순환출자가 규제될 경우 삼성, 현대차, 현대중공업, 동부 등 15개 기업집단이 신규 투자와 자금조달 부문에서 애로를 겪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밖에 자산총액 1,000억원 이상이면서 자회사 주식평가 합계액이 자산 총액의 50%가 넘으면 무조건 지주회사로 분류돼 각종 행위제한을 받는 것, 감사 선임 시 3%로 제한하는 등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도 경영 투명성 강화라는 명분 때문에 기업 경쟁력이 희생되는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 정부 "묶자" vs 재계 "풀자"… 논리는
출자총액제한, 상호채무보증, 내부거래 등 지배구조 및 투명성 관련 규제와 관련, 정부와 재계가 의견 충돌을 빚는 부문은 규제 방식이다.
정부는 대기업 규제에 대한 현재의 ‘당연위법(per se illegal) 규제주의’가 지속돼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재계는 ‘합리적 규제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당연위법(違法)이란 개별 경영행위에 대한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사전에 요건만 맞으면 무조건 규제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는 계열사간 순환출자, 채무보증, 내부거래는 원론적으로 소액주주나 소비자 후생을 저해하는 ‘반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전에 강력하게 규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낮은 소유 지분율에도 불구, 순환출자를 통해 황제경영을 하는 현재의 재벌 체제는 부당한 사익추구로 소액주주권을 침해하고, 기업집단의 동반 부실화 및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그에 상응한 강력한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출총제와 관련, 재벌 계열사의 자회사 출자를 규제하지 않으면 독립된 중소기업이 동종업계의 재벌계열 회사와의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규제당국의 입장이다.
또 출총제는 다른 회사의 주식취득만 제한하는 것이므로 기업의 생산적인 투자를 저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이 적대적 인수ㆍ합병(M&A)에 대한 경영권 방어능력을 약화시킨다는 재계의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상황 인식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순환출자로 ‘가공 자본’을 만들어 놓은 재벌 소유지배 구조 자체가 M&A의 표적이며, 규제 당국의 주장대로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가공 자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만이 M&A 위험을 없애는 길이라고 반박한다.
반면 재계는 대기업을 ‘한국의 재벌’이 아니라 ‘외국 거대기업과 경쟁하는 한국의 작은 기업’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외국에서 다국적 기업과 경쟁을 벌이기에는 아직도 기업 규모가 적으므로, 경제력 집중 억제 차원에서 취해진 각종 규제가 시대 변화에 맞도록 바뀌어야 한다는 것.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재벌의 주장과 행동은 무조건 ‘반 사회적’이라는 접근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평가를 토대로 풀어줄 것은 과감히 풀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여론의 비난을 받는 총수의 황제경영 행태에 대해서는 총수 개인의 부정 행위에 불과하며, 출자구조나 지배구조를 통해 바꿀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회사 이익을 총수가 편취하는 행위가 있다면, 소액주주의 권익을 강화하는 입법을 통해 총수 개인의 왜곡된 행동을 차단하면 되지, 기업 경쟁력과 직결된 지배구조를 바꿀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 대기업이 받는 네가지 규제
현재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대기업에 가해지는 규제는 크게 4가지다.
가장 강력한 것은 동일 그룹 계열사간 지분의 교차 보유를 금지하는 상호출자제한. 자산 2조원 이상의 대기업 집단 계열사가 해당된다.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은 계열사간 채무보증도 할 수 없다. 금융시장에서 모그룹의 힘을 빌어 경쟁 중소기업보다 손쉽게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 일부 기업의 자금위기가 연쇄적으로 대기업 전체의 도산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장치이다.
상호출자제한과 채무보증금지은 재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산규모 10조원 이상 대기업집단 계열사의 출자를 제한하는 출자총액제한에 대해서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는 재계 요구에 따라 지난해까지 자산규모 ‘6조원 이상’이던 기준을 ‘10조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했고, 계열사별 출자한도도 25%에서 40%로 큰 폭으로 올렸다.
재벌 금융회사가 같은 계열사 보유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완전하게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도 반발의 대상이다.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재벌 금융회사는 같은 계열사에 대해 15%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예컨대 A그룹의 A생명보험이 A전자지분을 25% 보유하고 있더라도, 주총에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15%로 제한되는 것이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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