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가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야외 조각공원에 멋진 볼거리가 등장했다. 무거운 쇳덩어리를 마치 엿가락 휘듯 구부려 허공에 거침없이 드로잉을 한 듯한 이 조각들은 18일 시작한 프랑스 개념미술가 베르나르 브네(66) 회고전의 일부다.
이 조각들은 가장 작은 것이 1.5톤, 가장 큰 것은 11톤이나 된다. 그런데도 둔중한 느낌이 전혀 없고, 날아갈듯 시원스럽다. 작가는 “완전히 자유롭고 해방된 선의 카타르시스를 느껴보라”고 권한다.
철로 그려낸 이 거대한 선의 드로잉들은 계산에 따라 용접하거나 녹여서 만든 게 아니라, 단단한 철강을 통째로 구부릴 때 철강이 저항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빚어낸 것이다. 작가의 통제 범위 바깥에서 완성된 이 작품들을 그는 ‘비결정적인 선’이라고 부른다.
브네는 미술의 목적을 ‘미(美)가 아닌 지식을 담는 것’ ‘미술의 역사를 바꾸는 것’으로 설정해 기존 통념을 뛰어넘는, 지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작업을 해온 작가다. ‘작품과 거리 두기’와 ‘자아 제거’가 그 핵심이다. 석탄 더미를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끈끈한 타르가 흘러내리게 방치하고, 쓰레기 더미에 누워 쓰레기가 되는 퍼포먼스로 예술(예술가)의 추락을 감행하고, 수학 책을 아무데나 펼쳐서 확대하거나 증시상황판을 그대로 찍고는 남의 손에 이미지 선택을 맡겨 버리는 등 자기 작품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애써 왔다. 작품에서 자아를 지워버리려는 실험이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1971년부터 76년까지 작업을 완전히 중단하기도 했다. 주관이 낄 틈이 없게 자신을 묶어두던 강박과 집착에서 벗어나 작업을 재개하면서 나온 것이 ‘비결정적인 선’의 자유다. 그는 이제 작업 과정의 미학적 쾌락을 즐긴다.
‘하나의 이미지는 하나의 메시지만 전달해야 한다’는,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단의성’은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다. 예컨대 철강 조각 <274.5°의 호와 두 개의 현>에서 숫자는 철강의 휜 각도를 가리킬 뿐 다른 의미는 없다. 브네는 “ ‘의자’라고 이름 붙인 작품을 ‘암소’로 해석하면 곤란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단의성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수학이나 기하학을 애용한다. 수학 방정식이나 도표를 그린 그림도 많다.
한국에서는 첫 회고전인 이번 전시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2000년대의 최근작까지 주요 대표작 65점을 소개하고 있다. 거대한 철강 조각을 비롯해 회화, 사진, 퍼포먼스 등 40여 년간의 작품세계를 야외 공간과 제 1 전시실, 중앙홀에 펼쳐 놓았다. 전시는 7월 22일까지. (02)2188-6000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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