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역시 소주나 맥주가 최고라는 당신, 버전 1.0입니다. 맛보다 멋에 취해 와인의 성숙한 향을 즐긴다면 버전 2.0이군요.
그런데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구요? 싱글몰트 위스키와 샴페인, 보드카를 넘나들고 칵테일 몇 잔쯤은 뻔한 레서피 대신 취향에 따라 주문 제조해 마실 줄 안다면 아하, 버전 3.0입니다. 과하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지만 적당하면 인생의 감로주 역할을 톡톡히 하는 술. 어느새 버전 3.0을 낼 정도로 음주문화도 숨가쁘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음주문화의 현주소를 요즘 잘 나가는 ‘알파걸’(학업과 직업, 리더십 등의 모든 면에서 남성과 어깨를 겨루는 엘리트 여성들) 세 사람이 집중토론했습니다.
<참석자>참석자>
"술은 남자 친구다"
▦ 박지영(28ㆍ피지정부관광청 실장) 싱글몰트 위스키 애호가. 2003년까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박씨는 여행업에 종사하는 지금, 술자리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프로모션에 적극 활용하는 등 일석이조 술 마시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술은 마음을 두드리는 노크다"
▦ 이계수(36ㆍ스위치코퍼레이션 전략기획실장) 화끈한 보드카를 좋아한다. 광고홍보ㆍ신규사업 파트 등을 총괄하고 있다. 금융, 정보기술(IT), 의료, 패션 등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는 만큼 참석하는 술자리도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자랑한다고.
"사랑하는 만큼만 마셔라"
▦ 김유미(29ㆍ숙명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샴페인 마니아. 졸업 논문만 통과되면 패션 마케팅 분야 해외 유학길에 오를 계획이다. 영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어학과정을 거친 김씨는 해외 체류 기간 동안 접했던 벨기에, 영국 등지의 독특한 생맥주가 한국의 바에도 많이 소개되길 바란다고 한다.
'술상무'의 시대는 끝났다
박지영(이하 박): 저는 대학교에 다닐 때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어요. ‘먹고 죽자’식의 술자리 문화를 정말 혐오했거든요.
이계주(이하 이): 저도 학창시절의 기억에는 술과 관련된 게 거의 없네요. 일을 시작하면서 남자에게 지기 싫어서 억지로 마시기 시작했으니.
박: 지금은 업무상 술을 마실 일이 많아요. ‘센 척’한다고 할까? 상대방에게 만만하게 보이기 싫어 술 마실 때도 일할 때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웃음) 다행스러운 건 요즘은 술자리 문화가 많이 달라졌어요. 선택할 수 있는 술의 종류도 많고 주량껏 마시면 그만이고요. 술을 강권하는 게 촌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니까요.
김: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97년만 해도 샴페인은 정말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만 마시는 술이었거든요. 그런데 클럽에서 맥주, 양주뿐만 아니라 샴페인이나 와인도 다양한 종류를 갖추고 팔고 있더군요. 저처럼 술이 약한 사람도 분위기만으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죠. 브라보.(웃음)
박: 실력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되고 있어서인지 술자리에서 업무 능력을 입증하겠다는 듯이 죽자 사자 마시는 술자리는 많이 줄었어요. 술자리의 주인공이 술이 아닌 사람이 된 걸 느껴요.
취향 따라 고르거나 만들거나
김: 요즘은 샴페인이나 와인으로 칵테일을 만들어 먹는 게 유행이에요. 맞춤 주문 칵테일이죠. 예전에는 칵테일바에 가면 TV프로그램에서 본 칵테일 이름을 외워가서 시키느라 진땀을 빼는 일도 많았잖아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레서피(제조법)도 취향에 따라 달리 할 수 있고 베이스가 되는 술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어요.
박: 술도 기성품 그대로 보다는 DIY로 즐기는 시대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이: 저는 이 시대의 술을 흥분과 진정이라고 정의해요. 때로는 흥을 돋워 주는 도구로, 한편으로는 기분을 침착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거든요. 보드카는 한꺼번에 마시는 소위 ‘원샷’ 스타일뿐 아니라 서서히 음미하면서도 마실 수 있어서 좋아요. 저는 크랜베리 주스에 섞어 마시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냥 먹으면 소주의 느낌도 나요. 어떤 사람과도, 또 어떤 술이나 음료와도 잘 어울리는 술이라는 얘기죠.
박: 제가 수많은 술 중 선택해 즐겨 마시는 싱글 몰트 위스키는 향이나 목넘김이 좋습니다. 맛이나 향을 음미하는 사람들을 위한 술이라서 싱글 몰트 위스키는 주류산업의 성숙도를 상징하는 척도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싱글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참 많이 달라졌어요. 노처녀ㆍ노총각이라는 말보다 싱글이라는 말을 선호하잖아요. 골프에서 싱글은 뛰어난 실력을 뜻하고요.
술에는 성차별이 없다
박: 술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해 볼까요? 술은 남자친구다!
이: 그건 지금 남자친구가 없다는 뜻?(웃음)
박: 선택범위가 확대된 만큼 이제 어떤 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譴訣側?결정돼죠.또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언제든 만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내 술을 나눠 마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자친구 같아요.(웃음)
이: 저는 술잔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서로의 마음에 노크하는 소리로 들려요. 누군가에게 “술 한잔 마시자”고 얘기할 때는 이 말에 특별한 의미를 담는 것 아니겠어요? 이 사람에게 나의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겠다는 생각, 최소한 3시간 이상은 함께 있겠다는 각오로 제안을 하는 거죠.
박: 처음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어요. 술 문화가 달라졌어도 여전히 여자들이 술을 마시는 데 대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여자들도 사회생활을 하니 달라진 음주 문화를 수용하듯 여성의 음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직업상 술자리를 갖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제가 오히려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술자리를 만들어요. 사람과 만리장성 쌓는데 술자리 만한 게 어디 있나요?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사진 류효진기자 jsknight.co.kr
■ '맛으로 즐긴다' 달라진 음주문화
“저는 술을 맛으로 마셔요.” 영화 <생활의 발견> (2002)에서 초점 흐린 눈빛으로 파트너를 바라보며 배우 예지원이 내뱉은 대사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생활의>
하지만 지금 이 말은 실제 상황이다. 술을 맛으로 마시는 사람들이 늘었다. 심지어 ‘스타일’로 술을 즐긴다는 이들도 있다. 술은 점점 더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있다.
술 소비가 다시 늘었다. 최근 국세청이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5년 감소세를 보였던 우리나라 전체 술 소비량이 2006년에는 317만㎘로 전년 대비 2.4% 늘었다. 이는 여성 음주인구 증가와 함께 와인으로 대표되는 저도주(低度酒) 보급 확대에 따른 것이라는 게 국세청의 분석이다.
하지만 단순히 저도주만으로 한국의 술 소비 동향을 해석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특히 독주인 위스키는 소비가 줄었는데 위스키 수입 업체들은 보드카, 데킬라 등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 수입을 늘리고 있다.
또 이들이 청담동 일대에서 대규모 파티를 열고 공격적인 프로모션에 나서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위스키 전문업체 진로발렌타인스 홍준의 홍보팀장은 “전체적으로 양주 소비량은 줄고 있지만 싱글 몰트 위스키(특정 증류소에서 100% 맥아를 숙성시켜 만드는 순종 위스키) 판매량은 지난해 전년 대비 20% 가량 늘었다.
유학생과 외국문화를 접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위스키를 대체하는 보드카, 데킬라, 진 등 증류주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말한다. 술도 아이스크림 골라 먹듯 취향대로 골라 마시는 기호품이 됐다는 소리다.
위스키의 경우 싱글 몰트 위스키가 각광 받으면서 위스키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여성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주류 업계 관계자들은 싱글 몰트 위스키가 와인과 함께 주류 시장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주요 지표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질로 승부하는 술이라는 뜻이다. 국내 음주문화 세대교체의 첫 신호탄이었던 와인 열풍이 위스키 시장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싱글 몰트 애호가인 장헌상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 대표는 “와인이 유행하면서 한국도 술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마시는 과정을 중시하는 ‘질적인 음주’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위스키도 ‘좋다’ ‘나쁘다’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평가하던 데서 벗어나 캐릭터별로 세분화되는 위스키 맛의 경로를 인식하는 시대가 됐다”고 싱글 몰트 위스키의 유행을 풀이했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위스키의 생산지, 향, 독특한 맛 등이 대화의 주제가 되는 일은 퍽 흔하다.
주류 선택폭이 넓어진 요즘, 바(Bar)가 카페를 대신하는 인기 사교장으로 부상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울 청담동 일대와 각 특급호텔 사이에는 각종 주류를 종합해 파는 바가 유행이다.
소주와 맥주 양주 뿐 아니라 칵테일 베이스 정도로만 알려졌던 보드카 진, 와인 등 다양한 주종을 고루 갖춰 주종 선택권을 넓힌 것이 장점이다. 파크 하얏트 서울의 ‘더 팀버 하우스’의 경우 소주 바, 칵테일 바, 위스키 바가 한 곳에 결합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순한 바가 아닌 그 이상의 새로운 문화공간을 제공한다”는 게 매트 수터 파크 하얏트 서울 식음료부장의 말이다.
술에 대한 기호가 다변화되면서 맥주 등 기존 주류 업체들도 틈새 상품 개발에 열심이다. 지난해 100% 보리 맥주 ‘맥스’를 내놓은 하이트맥주 관계자는 “여성이나 외국생활을 경험한 젊은층 등 술 소비 계층이 세부적으로 나뉘면서 기존에 없는 틈새 제품에 대한 수요도 커지고 있다”고 신제품 개발 배경을 밝혔다.
물론 달라진 술 문화가 모두에게 환영 받는 것은 아니다. 이상명(39) 멜론 PD는 “여자 동료가 많아지면서 술을 많이 마시는 회식 자리가 줄고, 주종도 와인 샴페인 칵테일 등으로 다양화하는 추세”라고 달라진 회식 문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간단히 마시고 헤어지는 술자리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예전보다 술자리가 깔끔하고 건강에도 이로우니까 좋지요. 그렇지만 술자리는 원래 하나되는 자리잖아요. 서로 망가지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좀 허전하던데요?”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 요즘 인기 젊음의 술
‘술, 취하기 위해 마신다’며 주종 불문하고 하얀 밤을 꼬박 지새우는 술자리만 찾으십니까. 여기 요즘 젊은층이 맛으로 또 멋으로 마신다는 몇 가지 술에 대한 정보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주말엔 술 대신 분위기에 취해보시죠.
1. 모히토(Mojito)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쿠바 칵테일. 최근 서울 강남의 유명 바에서 주력으로 미는 술이다. 민트 잎과 럼 베이스가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낸다. 보드카를 병째 주문해 나만의 개성이 담긴 칵테일을 만들어 즐기는 게 요즘 젊은이들의 트렌드. 따라서 베이스로 보드카를 쓴 모히토도 인기다. 영화 <007 어나더 데이>에서 제임스 본드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권하는 술로 등장한 이래 가장 ‘핫(Hotㆍ최고의 유행)’한 칵테일로 군림하고 있다.
2. 모엣&샹동 브루트 임페리얼
260년 된 샴페인 브랜드 모엣&샹동의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된 샴페인. 여러 철에 걸쳐 다양한 재배지에서 수확된 포도주를 혼합해 만들었다. 200㎖ 미니사이즈도 있어 클럽 등에서 병째 마시며 파티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3. 칼루아 밀크
커피를 베이스로 한 리큐어(위스키 등 증류주를 베이스로 과실류 등을 첨가해 가공한 술) 칼루아를 활용해 집에서도 만들 수 있는 칵테일. 얼음이 든 잔에 칼루아와 우유를 1대3 비율로 섞는다. 대형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리큐어 칼루아는 커피, 아이스크림, 밀크셰이크 등과 혼합해 손쉽게 ‘홈 칵테일’로 즐길 수 있다.
4. 예거마이스터
알코올 도수 35도로 영하 18도에서도 얼지 않는다는 독일 전통주. 냉동실에 넣어 차갑게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오렌지주스, 에너지 음료 등과 섞어 마신다. 서구에서는 맥주를 마시는 중간 또는 마지막에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비어 체이서(Beer Chaser)’용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는 식후 소화를 돕기 위해, 또는 감기 기운이 있을 때 한잔씩 마시는 약용주로도 쓰인다.
5. 맥캘란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싱글 몰트 위스키. 중세 시대 스코틀랜드 스페이 강 유역 크래겔러키에서 탄생했다. 고급 보리 품종인 ‘골든 프라미스’만을 고집한다. 국내에서는 12년산과 18년산이 30~40대 남성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 12년산은 달콤한 과일향과 백포도주향이, 18년산은 감귤향이 나는 게 특징이다.
6. 시락(Ciroc)
100% 프랑스산 포도로 만든 보드카. 작은 잔에 차가운 시락 70%정도를 채운 후 청포도 알을 하나 넣고 ‘원샷’으로 마신다. 술을 한 입에 털어넣고 나서 청포도를 함께 먹으면 과일향이 잘 우러난 최고의 맛을 낸다는 게 시락 마니아들의 설명.
김소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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