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도산공원 산책을 나선 길에 기막힌 장면과 마주쳤다. 도산공원은 사시사철 신랑 신부들이 사진 촬영을 하는 곳인지라 그날도 여러 쌍의 예비 부부들을 무심히 지나쳤는데, 마침 한 쌍의 신랑 신부가 화장실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와이셔츠 바람의 신랑이 드레스 차림의 신부 어깨를 감싼 후 신랑의 윗저고리를 뒤집어 쓴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젊은 여성이 화장실에서 빼낸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개봉했던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을 패러디하여 사진을 찍는 모양이었다.
판박이 사진 찍는 신랑신부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할머님 한 분이“젊은이들 이게 무슨 짓인가, 물 아까운 줄도 모르고 너무들 하는구먼. 공원 관리인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겐가?”라고 호통을 치셨건만, 그날 도산공원을 찾은 신랑 신부들은 줄줄이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비 맞는 모습을 촬영하는 희극을 연출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대학에서 진행 중인 졸업앨범 사진촬영 현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결혼식은 앞으로 여러 번(?) 할 수도 있지만 졸업식은 일생에 한 번 뿐이잖아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기록해두고 싶어요.” “사(死)학년을 보내면서 이 정도의 사치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앞세우며 사진 촬영 날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한껏 성장을 하고 나타난다. 한데 정작 신기한 건 모두들 검정 치마에 흰색 윗도리 정장(이름하여 ‘유관순 복장’이라 한단다)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선다는 사실이다.
대학 졸업의 기쁨이든 결혼의 감격이든 모두 개인의 생애주기에서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할 사건임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다만 그 기억이 너나없이 세련된 모습으로 연출되고 표준화된 형식으로 찍혀 나오는 것만은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사진 속 내 모습이 낯설게 다가올수록 실상 나의 소외감은 깊어만 가고, 사진 속 추억들이 빛을 발할수록 우리의 일상은 더욱 남루하게 비치는 것 아니겠는지.
5월 들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많고 많은 날들을 지나가노라니, ‘그래도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던 어르신들 말씀이 생각나 책꽂이 구석에 먼지 뒤집어 쓴 채 꽂혀 있는 사진첩을 펼쳐 들었다. 고운 한복에 면사포 쓴 수줍은 신부와 포마드 발라 잘 빗어 넘긴 머리에 양복을 갖추어 입은 새 신랑의 빛 바랜 결혼사진을 들여다보며 ‘부모님에게도 이런 시절이 계셨구나’, 옛 모습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고, 지금은 은퇴하신 선생님들 한창 때 모습과 이젠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리잡은 제자들의 어설펐던 학창시절 모습을 뒤적이며 ‘사진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는구나’ 새삼스레 무릎을 치는 맛도 의외로 즐거웠다.
하나뿐인 나만의 추억 담아야
언젠가 친구 집에 놀러간 길에 재미난 졸업앨범을 본 적이 있다. 미국의 스몰 칼리지 앨범이었는데, 이야길 들어보니 그곳에선 졸업생의 가족, 친지, 친구들이 주인공을 위해 졸업앨범의 지면(紙面)을 사 준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지면엔 주인공의 학창시절 인상 깊었던 기억, 아찔했던 순간, 잊을 수 없는 친구들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고, 사진 아래쪽엔 곳곳에서 지인들이 보내온 다채로운 축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마다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추억을 간직하게 되는 졸업 앨범의 주인공들이 부럽기만 하다.
지나온 시간들을 미화하는 것 자체가 나이 듦의 징표일 테지만, 똑같은 정장에 판에 박은 듯한 미소에 동일한 장소를 배경으로 추억을 촬영하는 우리네 모습을 볼 때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기만 한 것이 왠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만 같아 아쉬움이 크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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