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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사유(思惟)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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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사유(思惟)의 위기

입력
2007.05.1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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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 방화지역의 주민들과 글쓰기 공부를 한다. 함께 중국과 한국의 고전을 읽고, 글의 대강을 요약하는 법부터 내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익혀나가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 새로운 책을 읽어오라는 과제를 내고 그 책을 읽은 것을 토대로 글쓰기 수업이 이어진다. 그런데 1주일에 겨우 한 권 읽어오라는 숙제를 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있어서 알아보니 책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책을 사면 그만이겠지만 이들은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다. 또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과정 자체가 공부가 되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라는 사회복지사의 제안도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공공도서관이었다. 인구 53만 명인 강서구에는 공공도서관이 딱 두 군데인데 그 중 하나인 길꽃도서관은 어린이도서관이어서 어른들이 책을 빌릴 수 있는 곳은 등촌동에 있는 시립도서관이 유일했다.

민간에서 세운 공공도서관 두 군데도 모두 어린이도서관인 데다가 강서구청이 올해 처음 동사무소를 개조해 공공도서관으로 만들겠다는 화곡3동도 어린이 청소년용을 지향하고 있어서 어른들의 사정은 참 딱하다. 버스를 타고 시립도서관에서 어렵사리 책을 빌렸던 한 분은 반납기일을 놓쳤다. 도서관이 멀리 있으니 알 만하다.

결국 이 어른들은 주로 자녀들을 통해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빌린다. 자녀가 어리거나 없는 사람은 이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새로 생겨나는 것은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다.

●뻔뻔한 권력층, 기죽은 빈곤층

인문학이 위기라고 한 때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 때 시끄럽던 학자들이 외쳤던 것은 인문학자들의 진로 위기였지만 실제의 대한민국은 사유가 없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맞다. 사유가 없으니 돈 있고 권력을 쥔 사람들은 스스로를 절제할 줄 모르고 가난하고 못 배워서 힘없는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기 힘들다.

재벌회장은 법을 믿기보다 주먹을 믿고 공기업 감사들이 회의를 빙자해 외국여행을 즐긴다. 인문학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서 인간으로서 품위를 찾게 하는 학문인데, 있는 사람은 뻔뻔해서, 없는 사람은 기죽어서 품위를 찾지 못하니 인문학의 위기는 맞다.

헌데 이 위기를 타개하는 방식조차 왜 이토록 반인문학적인가. 인문학적으로 사유했다면 가장 약한 사람부터 돕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공부는 맘껏 할 수 있는 도서관을 곳곳에 만들어주는 일은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안이다.

그런데 기금이 먼저 조성되고,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인문학 위기를 타개하는 연구를 하느라 배운 사람들이 그 돈을 다 써버리고, 못 배운 빈민들은 책 한 권 쉽게 보기 힘든 현실에 그대로 버려져 있다.

●어른을 위한 도서관을 더 많이

무슨 대단한 시설을 구하는 게 아니다. 제발 이제 번드레한 시설은 그만 짓자. 번드레한 이론도 사절이다. 1만 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책 정도는 쉽게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을, 도서실을 만들어 다오. 학교 도서관을 활성화시키면 충분한데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새로운 시설을 짓느라 공공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제발 그늘로만 살아온 어른들이 갈 도서관을 만들자.

한마디를 더한다면 제발 시설이 아니라 내용에 투자해다오. 콘텐츠의 시대가 왔느니 콘텐츠가 중요하니 하는데 콘텐츠는 게임이나 정보산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용을 중시하는 것이 콘텐츠 시대이다. 동사무소를 개조하느라 힘을 쓰지 말고 시설은 허름해도 거기에 놓일 책을 더 좋은 것으로 많이 들여놓고 더 많은 사람이 읽게 하는 방안을 고심해야 한다. 이미 있는 공공도서관도 다른 예산이 아니라 책을 사들일 예산을 많이 줘야 한다.

제발 문화관광부나 교육인적자원부나 각 지방자치단체나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명목으로 시설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문화운동을 한다고, 혁신적인 교육을 한다고 하드웨어에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편안하게 책 읽을 공공도서관이나 많이 만들기 바란다. 그게 바로 콘텐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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