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서울연극제’가 후반부로 치닫고 있다. 대한민국연극제 시절부터 그 간 변화와 개선을 향한 행보를 늦춘 바 없는 서울연극제가 축제의 성격을 분명히 찾지 못해 활력이 현저히 줄어든 느낌이다.
올해는 모두 여섯 작품이 공식 참가작으로 선정됐는데 그 중 해외 번역극 초연작들이 눈에 띈다. ‘21세기 베케트’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노르웨이 출신 작가 욘 포세의 작품 <이름> (윤광진 연출)과 토요일에 막 내린 일본의 쓰쓰미 야스유키(堤 泰之)작 <연기가 눈에 들어갈 때> (김순영 연출)가 연극제 성격의 일면을 내비치고 있다. 연기가> 이름>
한 가지는 현대연극의 동향에 대한 예민한 촉수요, 다른 한 가지는 보편성과 대중성의 존중이다.
연극제가 선명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경연대회처럼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 의제 설정을 한다거나, 연극계 내부의 축제라면 연극의 전반적인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자극과 갱신의 기회를 부여할 수도 있다.
시민들을 위한 축제라면 관객지원제도를 활성화하여 많은 시민들이 연극을 즐기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데 연극제가 열리는 극장가는 한산하기만 하다.
다만 5월 ‘가정의 달’에 걸맞은 한 편이 관객몰이를 거듭했는데 단 5일 동안의 부흥이어서 아쉬웠다. 화장터를 극 중 공간으로 삼고, 화장되는 동안 혼령이 되어 유족 대기실에 머무는 두 사내의 영혼을 통해 가족이란 관계와 의미를 생각케 한 <연기가 눈에 들어갈 때> 는 일상의 소중함, ‘지금 여기’에 머묾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연기가>
봄날의 끝 자락에서 의무방어전 치르듯 행해지는 연극제를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기업의 메세나 지원과 서울시, 문화재단 등이 축제를 위해 십시일반하는 동안 연극제의 성격이 분명치 않게 된 것일까?
차별화한 축제로서의 성격이 없으니 자생력을 갖추기 어려워보인다. 19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지배이념의 설교장이 되는 굴욕도 겪었고 희곡 심사냐 실연 심사냐, 경연 제도냐, 축제 형식이냐, 창작극 우대냐, 번역극과의 균형이냐 등 존폐여부부터 개선 방안까지 다양한 논쟁거리를 제공한 서울연극제가 봄날에 묻혀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19일까지 창작극 <발자국 안에서> (아르코 소극장)와 번역극 <골드베르크 변주곡> (소극장 정미소) 두 편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골드베르크> 발자국>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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