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출
미술작가 ‘씨킴’은 자기 내면에서 폭발해 솟구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미술작가가 되었다. 서울대나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경희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5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미술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이단적’이다. 혹시 쇼를 하는 것은 아닐까.
충남 천안시 아라리오 갤러리 류근덕 실장은 이렇게 진술한다. “1999년 가을 어느 날이다. 회장님이 부르시더니 캔버스와 물감, 붓 등 화구일체를 구입해 오라 하셨다. 그런데 천안의 화방에서 구입한 화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바로 다음날 서울엘 가자 하셨다. 작업을 해야 하겠다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이 꿈틀거린다는 말씀으로 그림 시작의 동기를 대변하셨다.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새벽까지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고독한 호랑이
미술작가 ‘씨킴’은 인터뷰 약속시간에 한발 늦어 아라리오 갤러리의 5층 작업실에 도착했다. 100평이나 되는 그의 작업공간은 각종 물감과 설치미술 오브제와 사진작품 도구들로 가득하다. 1951년생, 56살인데 뱃살이 하나도 없고 동작이 활기차다. 호상(虎像)에 턱수염이 희끗희끗하니 그대로 미술가의 풍모다.
그의 명함은 간단히 ‘아티스트 씨킴’이다. ‘씨킴’은 본명 김창일의 영문 두문자((Ci Kim))를 딴 작가명이다. 상단에는 마주 다가가는 애벌레 두 마리의 스케치가 있다. 그런 명함을 건네면서 “애벌레가 매미가 되어 펄펄 날아 가지요”하고 초대면 인사를 한다.
●예술가 되려고 큰 돈 벌고 큰 손 되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김창일은 미술작가가 되기 위해 먼저 돈을 벌었다. 주식회사 아라리오를 세워 천안 버스터미널을 기점으로 불과 20년 만에 미술관, 조각광장, 백화점, 버스터미널, 시네마 멀티플렉스, 식당가로 이루어지는 ‘아라리오 문화소도시’를 건설하니 남들은 그가 꿈을 이룬 것으로 여겼다.
씨킴은 이에 머물지 않고 새 일을 저질렀다. 미술작가에 대한 잠재적 욕구를 미술수집에 쏟더니 돌연히 세계적 큰 손으로 나타난다. 데미언 허스트는 1990년대에 국제 미술시장에 급부상한 ‘영국 젊은작가들(브리타트)’의 선두 주자다.
3,000점에 이르는 미술작품을 수집해온 씨킴은 2002년에 런던 화이트큐브 미술관에서 높이 7m인 허스트의 대형 인체장기모형조각 ‘찬가’를 25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를 아라이오 미술관 앞 옥외에 세우고, 방탄유리 집을 지어 경비원을 24시간 배치하자 런던 미술계는 뒤집어졌다.
영국의 권위지〈디 인디펜던트〉2003년 9월 17일자는 ‘미스터 김의 눈에 포착된 데미언 허스트와 사치 미술관(런던 현대미술관 이름)’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브리타트’ 의 핵심작품이 한국 서울 외곽의 이름 없이 한가한 쇼핑 몰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곁들여 돋보기로 이마와 눈 부위를 확대한 씨킴의 작품 ‘자화상’을 소개했다.
씨킴이 미술작가로서 독일에 상륙한 것은 2004년. 독일 예술생활 잡지 〈모노폴(monopol)〉은 ‘씨킴은 누구인가’를 소개하는 2쪽 기사를 먼저 싣더니 2006년에는 예술세계의 최고 100인(톱 아인 훈데르트) 중 42위로 올렸다. 미국 아트뉴스 지도 세계 200인의 미술수집가로 그를 선정했다.
2005년 씨킴은 아라리오 미술관에서 라이프치히 화파(畵派)의 콜렉션을 전시했는데, 그때 라이프치히 미술관장 한스 베르너 슈미트가 씨킴의 사진 작품 한 점을 자기네 미술관 중앙 로비에 영구히 걸기로 약정한다. 씨킴이 독일 출장을 갔다가 길거리 포스터의 12포인트 활자 문구가 예뻐서 사진을 찍어 확대한 작품으로 “나치 쓰레기는 물러가라”는 글귀다.
씨킴의 다양한 작품이 한국화단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씨킴 자신의 말처럼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미술적 에너지가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 미술계에 미쳤으니 씨킴의 미술 사업과 작업이 현실적으로 국내외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분명하다.
●남산과 매미
인터뷰 첫 머리에 씨킴은 남산에서 매미 잡던 추억을 유난히 강조했다. 매미가 ‘맴 맴’울던 소리를 미술작가가 된 그는 매미가 꿈을 부르며 ‘드림 드림’하고 우는 소리로 해석하고 있다. 씨킴이 남산과 매미에 관해 언급하는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나는 그 보다 앞서 해방 이후 공간에서 남산 숲속을 내 달리며 매미와 나비를 채집했다. 남산은 내 소년기의 추억이 새겨진 동산이지?동시에 우리 가족의 해체를 묵묵히 지켜본 산이다. 6ㆍ25 전쟁 이후에 남산을 누비며 성장한 씨킴은 나의 남산초등학교 후배가 된다.
남산의 매미는 기업가-콜렉터-예술후원자-예술생산자로 진화한 씨킴의 ‘꿈(드림)’을 운반하는 상징이다. 씨킴은 자신을 설화식으로 소개하는 연표의 앞 대목에서 남산의 매미를 특별히 강조한다.
“1951년 가족이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 남산 아래 회현동으로 이사함. 남산은 씨킴의 놀이터가 되어 여름이면 매미와 풍뎅이를 채집하러 산속을 뛰어다님.”
야우리 백화점 7층 씨킴의 집무실 입구에는 그런 ‘매미의 꿈’을 적은 영문동판이 걸려있다.
“드림 드림 드림(맴 맴 맴), 나는 사업을 건설함에 있어서 돈이 없어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했고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꿈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나의 예술로 표현하노라.”
매미는 꿈이다. 씨킴은 꿈을 좇아서 50대에 미술작가가 되는 길을 택했다. 지난해 6월 어느 날 씨킴은 홀연히 제주도 스튜디오로 내려가더니 금년 3월까지 두문불출하며 면벽수도 하듯 그림을 그렸다.
8개월간 그린 파스텔 작품을 내보이는 네 번째 개인전의 전시 제목은 ‘토마토로 토스트를 굽는 슬픈 호랑이’다. 독일 그림책의 삽화 주인공인 슬픈 호랑이는 호랑이 상을 한 작가의 자화상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비영리 전시기관 ‘비아파리니’의 디렉터 밀로반 페로나토는 전시 서문에서 씨킴을 일컬어 끊임없이 탐구하고 꿈을 꾸는 ‘임의론자(랜덤이스트)’라고 표현했다.
씨킴의 미학적 표현은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콜라주로 매체를 다양하게 넘나든다. 나는 이 고독한 호랑이에게 혼합성과 해체미학을 통해 매미의 꿈을 추적하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 한다. 그는 배부른 최고경영자의 여가 취미 정도로 미술을 하지 않는다. 프로가 되고 위대한 전업 작가가 되겠다는 꿈으로 지독한 자기훈련을 계속한다.
점심을 먹어가며 진행한 나의 인터뷰는 여섯 시간 만에 끝났다.
■ '기분좋은 ○X'가 제공하는 트렌드 ABC
고령화 시대가 되면, 50대 예비 시니어들이 퇴직기 이후의 삶을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은퇴이후 시기가 위기로 여겨지는 것만이 아니라, 새롭게 개척해야 할 시간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50대는 60대 이후를 창조적으로 살고자 한다. 새로운 전문가로 변신하거나 재취업을 비롯한 기회를 얻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한다. 50대부터 실버라이프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엔지니어, 디자이너처럼 프리에이전트(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는 지식산업 분야를 선호한다. 민간운동가, 예술가와 같이 정년이 없고 사회공헌도 가능한 전문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다.
2000년대 초반에 60세의 회춘과 변신이 붐을 이루었고 2000년대 중반에 마흔의 변신이 조금씩 대세가 되고 있다. 50대에 새로운 전문가로 변신하는 것은 아직은 다소 앞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5년만 지나도 이런 일은 좀더 대중화될 것이다.
홈페이지 www.givenzoneqx.com
안병찬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ann-b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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