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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부 칼럼] 신사임당, 유관순,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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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부 칼럼] 신사임당, 유관순, 황진이

입력
2007.05.1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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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달 전, 잘 아는 역사학자 한 분이 물었다. "화폐 도안을 바꾼다고 여성 중 누구를 하면 좋겠느냐고 묻던데, 누가 좋다고 생각하시오?" "황진이가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그 분은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생인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좋은 시를 남긴 탁월한 시인이기도 하지요"라고 우겼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는 황진이의 이미지는 예술가보다는 기생인 듯하다.

2년 뒤 10만원ㆍ5만원 짜리 지폐가 발행될 예정이고, 거기에 누구 초상을 넣을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금 지폐에는 세종대왕ㆍ이황ㆍ이이가, 주화에는 이순신이 모셔져 있다. 모두 남성이고 이(李)씨다.

이런 편중현상을 피하자는 게 새 화폐 도안의 요점이다. 화폐 초상과 관련해 여러 번 여론조사를 한 한국은행은 "나올 인물은 다 나왔다"고 말한다.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은 김구이고 정약용, 신사임당, 유관순 등이 이어지는 모양이다. 모두 훌륭한 행적을 남긴 분들이다.

● 10만원권에 여성계 관심 몰려

3년 전 고액권 발행이 검토되기 시작했을 때, 여성계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여성을 모델로 해야겠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단체는 집회를 열어 신사임당을 모델로 촉구했다. 당시 우먼타임스가 여성 국회의원에게 조사한 결과는, 유관순이 으뜸(40.7%)으로 꼽혔다. 신사임당의 두 배에 가까운 지지였다.

그가 '역사상 어떤 남성 위인에도 뒤지지 않는 용기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될 경우 아들 이이와 나란히 영예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편중이 발생하게 된다.

이황과 이이는 훌륭한 성리학자다. 성리학은 인륜적 가치를 진리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당위를 광대한 자연 안에서 사유하는 사변적 학문이다. 그러나 성리학이 참신성을 잃고 이론에만 치우치자 실사구시의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고, 그 실학의 정점에 정약용이 있다. 성리학과 실학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사임당은 전통적 어머니상의 모범이다. 자녀교육에서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고 포도나 풀, 벌레 등을 섬세하고 정감있게 그린 <초충도(草蟲圖)> 나 친정을 그리워하는 시 등 예술적 성취도 뛰어났다. 또한 우리 시대인에게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유관순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이름으로 순교한 한 떨기 고결한 꽃이다.

두 분이 추앙되는 사정을 알고도 황진이를 얘기한 것은, 기발한 발상을 뽐내고자 함이 아니다. 화폐에서 너무 백안시되고 있는 분야의 하나가 예술인이다. 국내 뿐 아니라 동양 서예계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가 거론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세의 시인 황진이가 기생이라는 이유로 배척되는 것이 안쓰럽다.

황진이는 근래 특히 대중적으로도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재조명되고 있다. 뮤지컬과 TV드라마, 영화, 문학의 주인공으로 우리 연예산업의 '대장금'이 돼 가고 있다.

황진이가 시조를 못했으면 황진이였을까? 그는 시조시인들이 가장 아끼는 고시조 시인이다. 지난해 '나래시조'가 93명에게 조사한 결과 그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이 가장 사랑 받고 있었다. 다른 시조 '어져 내 일이여'와 '청산리 벽계수야'도 10위 안에 들어, 이 시대에도 절창으로 평가 받고 있다. 화폐 도안 때문에 위인의 순위를 매기는 일은 민망하다. 선택의 문제다.

● 화폐도안 전면 재조정의 기회

문화현상으로 화폐를 보면, 우리가 봉건적 정서ㆍ의식에서 별로 벗어나 있지 않다. 고답적 형식이나 허위의식에 지배 받는 자화상도 발견된다. 하여 기왕 화폐 도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일었을 때, 화폐 도안 체계를 전면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지금처럼 유지하고, 새로운 시대상과 가치관에 어울리는 위인을 새로 모시는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

박래부 논설위원실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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