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테닛 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최근 조지 W 부시 행정부 전ㆍ현직 관리들로부터 집중적 비난을 받고 있다. 이 달초 발간된 회고록에서 “이라크전은 9ㆍ11 테러와의 명확한 관련성도 없는 상태에서 졸속으로 결정됐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악관이 이라크 대량 살상무기와 관련된 왜곡 정보를 흘려 나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직접 나서 “테닛 전 국장이 ‘9ㆍ11 조사위원회’에서 했던 증언과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며 ‘말 바꾸기’를 문제 삼았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CIA 전직 관리들은 보다 직설적으로 “자기만 빠져 나가려 한다”며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이라크전 공로로 받은 훈장이나 반납하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보 색채의 한 인사는 “책을 팔아먹기 위한 일반적인 수법”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한미 전직 고위관리들의 폭로
이와 비슷한 종류의 비난은 한국에서도 있었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한 대학 강연에서 재직 당시의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된 ‘폭로성’ 언급을 하자 열린우리당 김동철 의원은 국회에서 “동네 건달 수준의 의리도 없는 발언” 이라고 몰아 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총장까지 시켜줬는데 이제 정권이 끝나가니까 노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대려 한다는 얘기였다.
송 전 총장 발언의 요지는 ‘노 대통령 불법 대선자금은 한나라당의 10분의 2,3수준’, ‘노 대통령 측근들의 대검 중수부 폐지 압력’ 등이었다. 이는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에 유리한 소재였기 때문에 송 전 총장의 정치권 진입을 위한 사전포석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테닛 전 국장이나 송 전 총장에 대한 비난이나 의혹 제기가 전혀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책임 전가 또는 책 홍보를 위한 것이든, 정치권 구애 차원이든 개인적 동기가 있었을 법하다.
다만 이들의 행동을 좀더 긴 호흡에서 바라보면 정권의 힘이 빠져가는 말기에 정권의 가려진 곳을 들추는 폭로가 나오는 것은 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정권이 한창 힘을 받을 때에는 이른바 ‘다치기’ 때문에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 정권이 끝난 이후 다음 정권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해봐야 비겁한 사람이 되고 스스로 초라해지기 십상이다.
때문에 최소한의 당당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폭로로 그런대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시기로는 정권의 힘이 적당히 빠졌을 때가 적기이다.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최근 줄줄이 자리를 떠나고 있는 것도 그들의 ‘시장 가치’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한 적기가 바로 지금이라서 그렇다.
●진실 규명 도움되면 그나마 다행
여러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테닛 전 국장이나 송 전 총장의 발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의 역할이 ‘정권 말기의 필요악’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악’이라고까지 하면 그들이 억울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으나 다음 정권에서라도 그들의 발언이 역사적 진실 규명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 억울해 할 일도 아닐 것이다.
워싱턴=고태성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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