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바람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태세다. 우리나라에 영어가 처음 도입됐을 때도 이랬을까. 그 때 사람들은 영어를 어떻게 공부했을까. 당시 일화들은 이 시대에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개화기의 영어 이야기> 는 영어가 본격 상륙한 19세기와 20세기 초 영어 공부의 풍경을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는 영어 교육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해 1979~80년 <월간 영어> 에 연재했는데 이번에 그것을 재편집해 책을 냈다. 월간> 개화기의>
책에 따르면 영어 사용자가 우리나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653년 제주에 표류한 네덜란드 선박의 목수 바스켓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는 13년간 서울과 순천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한국인이 영어를 처음 발음한 것은 1816년이다. 영국 함대의 홀 함장이 우리나라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던 중, 아녀자들이 모인 골짜기로 다가가려 했다.
한 주민이 팔을 붙잡자 그는 “Patience, Sir!”(노형, 참으시오)라고 외쳤으며 주민들이 그 말을 따라 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영어의 천재는 김대건 신부였다. 1837년부터 5년간 마카오 포르투갈 신학교에 체류했는데 라틴어ㆍ프랑스어ㆍ영어 등 6개 언어를 사용했다.
1883년에는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이 도쿄에 머물던 도중, 그곳에 교수로 와 있던 체임버린으로부터 알파벳을 배웠다. 김옥균은 몇 년 뒤 뉴욕 유니언신학교 출신의 헐버트 일행이 제물포 항에 도착하자 마중 나가 제물포 일대를 가리키며 “My country. I very glad”라고 말했다.
윤치호 역시 1883년 1월부터 넉 달간 일본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그 실력으로 조선 주재 초대 미국 공사의 통역관이 됐다.
그는 훗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실력을 쌓았고 <걸리버 여행기> <로빈슨 크루소> 등을 번역하고, 영문법서 <영어 문법 첩경> 도 썼다. 그는 8개 언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로빈슨> 걸리버>
최초의 영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교가 설립된 것도 1883년이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지체 높은 집 자제들이 공부했는데, 영어와 문장 구조가 비슷한 한문에 능했던 덕에 해석은 비교적 잘 했다.
3년 뒤에는 관리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왕립 육영공원이 세워졌다. 1회생 35명은 영어를 몰라서 알파벳부터 배웠으며 약간의 어휘를 익히자 자연과학과 수학 등은 원서로 공부했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영어를 잊지 않도록 여름 방학에도 닷새마다 등교시켰다. 영의정의 아들이 시험을 보았는데, 교사들에게 높은 점수를 매겨달라고 청탁했다가 거절 당해 체면을 구겼다는 일화도 있다.
지식층을 주로 접대하던 기생 가운데서도 영어 공부에 나선 이가 있었다. 20세기 초 한남권번의 강향란은 배화여학교에 입학, 영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배우고 상하이와 도쿄를 유람한 뒤 돌아와 어엿한 신문 기자 생활을 했다.
영어 상륙 초창기의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당시의 모습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만 하다.
개화기의 영어 이야기 / 김명배 지음ㆍ문은경 엮음 /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발행ㆍ307쪽ㆍ1만5,000원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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