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할 생각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1권 68쪽) 못 보던 <서유기> 가 등장했다. 마치 입심 좋은 변사처럼,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들을 흥미진진하게 엮어 가면서 책은 활동 사진을 설명해 간다. 서유기>
소설 <쌀과 소금의 시대> 는 패러디의 백화점이다. <서유기> 를 변용 하는가 싶더니, 동서양의 역사를 슬슬 차용하고 종래는 맞바꾸기까지 한다. 기시감을 적절히 자극하는, 이른바 ‘대체 역사 소설(alternative history novel)’의 맛과 힘으로 상ㆍ하권을 끌고 간다. 서유기> 쌀과>
책 맛을 진실로 느끼려면 독자는 우선 편견의 상식들로 가득 찬 머리를 비워야 한다. 14~21세기의 70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은 동양이고, 세계적 종교는 불교와 이슬람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인류사와는 관련 없다. 흑사병이 중세 유럽 인구 99%의 목숨을 앗아가고, 중국과 이슬람이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는 가정 하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유럽이 역병으로 거덜나자, 세계는 중국 이슬람 유럽원주민연합(호데노사우니) 인도연합(트라방코르) 등 4개 권역으로 나뉘어 치고 받는다. 세상에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암운만이 자욱하다. 70여 년에 걸쳐 중국과 이슬람이 격돌한 ‘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겨눈다. 중국과 이슬람 사이의 격렬한 분쟁상은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을 떠올리게 한다. 가부장제, 제국주의, 기술 발전 등에는 어떤 변용이 가해졌을까. 군데 군데의 지도와 연표 등 독특한 장치가 이 소설은 하나의 완벽한 대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문명의>
“출산율은 여성 1인 당 2.1 명이지만 ‘긴 전쟁’ 이전에는 전 세계 평균이 5명, 최빈국에서는 7~8명 정도였다. (중략) 이제 만인연합이 주장하는 모든 권리를 여성이 행사할 수 있는 국가에서는….”(2권 635쪽) 소설이 제시하는 희미한 희망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인류의 운명에 대한 생각거리도 던져 준다.
결국 책은 침착하고 이성적인 힘의 손을 들어준다. 역사란, 무상한 윤회가 아니라 한발 한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라는, 역사학자 비코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사랑과 희망이라는 따스한 볕을 기원하는 것이다.
다소는 허황된 이야기를 견실하게 이끌어 가는 힘은 왕성한 상상력이다. 이것은 원래 작가가 1급 SF 소설가라 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 뒤늦게 소개되는 미국 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55)은 <화성 3부작> 으로 여러 상을 타면서 일약 주목을 받았다. 화성>
이 소설은 SF적 상상력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일변도로 흐르지 않고 생태나 사회학적 문제를 천착, 역사와 인류라는 문제를 새롭게 바라 보게 해 우리 시대를 반성하게 한다. 옮긴이 박종윤 씨는 “역사 사회 문화 종교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 덕에, 소름 끼칠 만큼 강렬한 지적 유희를 체험했다”고 밝히고 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쌀과 소금의 시대 /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ㆍ박종윤 옮김 / 열림원 발행ㆍ1권 704쪽 2권 676쪽ㆍ각권 1만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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