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참 이상하다.
5월이면 봄기운 폴폴 날리며 시원한 바람과 햇살을 즐기기에 적당해야 하는데 요즘은 이상하리만치 더운 날씨에 쉽게 지치게 된다.
어렸을 적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뭐냐” 물으면 서슴지 않고 “봄”이라고 대답하곤 했지만 지금은 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계절이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벌써부터 한낮에는 30도까지 치솟아 오르는 곳이 있다고 하니 시원한 음식으로 자꾸만 마음이 가는 것은 날씨와 함께 성급히 찾아온 나의 ‘여름 입맛’ 때문이 아닐까.
여름(아직 여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지만)이 찾아오면 시원한 국수가 떠오른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분식집을 찾아 쫄면을 시켜 먹으며 더위를 잊으려 애쓰기도 하고 또 주머니가 조금 여유로울 때는 냉면집에 가서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시켜 나눠 먹었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면’ 요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식탁 앞으로 출동할 정도로 남다른 애정이 있으니 시원한 각종 면 요리를 만끽할 수 있는 여름은 어찌 보면 봄만큼이나 나에게 소중한 계절이다.
‘계절 특선메뉴-물냉면, 비빔냉면’이라는 커다란 간판으로 나를 유혹하는 음식점 앞에서 성큼 다가 온 여름이라는 계절에 참 잘 어울리는 메뉴가 메밀국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현듯 해본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는 ‘외식=사치’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그래서 여름이면 집에서 주말 점심 별미로 메밀국수를 내놓으시곤 했다. 하루 전부터 각종 재료들을 넣어 끓여낸 육수를 식혀 하루 종일 냉장고에 시원하게 보관했다가 다음날 점심에 국수를 삶아내 부어주시던 분이 내 어머니다.
또 무더운 한여름이 되면 콩을 밤새 불리고 삶은 뒤 곱게 갈아 시원한 콩국수를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약간 날이 더워진다 싶으면 가장 먼저 생각 나는 것이 메밀국수다.
얼음 동동 띄워 짭조름 달달한 국물에 말아먹는 메밀 국수는 내게 여느 ‘냉요리’보다 단연 최고의 요리다.
결혼을 하면서 엄마의 메밀국수는 자주 맛볼 수 없게 됐지만 그래도 요리사 남편 노다씨 덕에 더 맛있는 메밀국수를 맛보게 됐다.
최고의 메밀국수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노다씨의 육수 맛 만큼은 단연코 최고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일단 그의 육수는 다른 것에 비해 조금 진하다.
진하다는 말은 농도가 짙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종 재료의 맛이 진하게 배어있다는 말이다. 일본 간장의 거하지 않은 짠맛에 적당한 달콤함이 녹아 들어 있다. 거기에 어떻게 끓였는지 몰라도 참 은근한 불 향기가 난다.
이 향이야말로 제대로 된 참 육수맛을 내는데 이런 향은 어느 음식점에서도 맛보기 힘들다.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잘 만든다고 했던가. 나에게는 면을 쫄깃하게 끓여내는 재주가 있었으니 둘이 힘을 합쳐 메밀국수를 만들면 먹는 사람들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육수의 맛도 중요하지만 국수를 얼마나 쫄깃하게 잘 삶아내는가에 따라 이 메밀국수의 완성도가 좌우된다.
나만의 노하우를 말하자면 생면보다는 건면을 사용한다는 것. 사실 모든 이들이 제대로 된 국수를 끓일 때 생면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 경우 웬만한 기술력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면 실패하기 일쑤다.
조금만 때를 잘못 맞추면 푹 퍼지거나 설익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건면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쫄깃한 면발로 거듭난다. 냄비에 물을 충분히 넣어 팔팔 끓이고 건면을 넣는다. 건면이 서로 붙지 않게 한두 번 저어주다가, 거품을 일으키며 물이 냄비 밖으로 넘치려는 찰나에 찬물을 한 컵 시원하게 부어준다.
그리고 또 다시 끓어 넘치기 직전 찬물을 한 컵 부어주고 10~20초간 끓이다가 한 가닥 들어올려 맛을 보아 익은 정도를 확인한다. 면이 익었으면 재빨리 체에 받쳐 찬물에 열심히 헹군다.
이 때 면 안에 남아 있는 따스한 기운이 빠질 정도로 충분히 헹궈야 비로소 쫄깃한 면발이 된다. 이렇게 끓여낸 물에 노다씨표 육수를 부으면 그야말로 끝내주는 메밀국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에 진하게 다려낸 일본식 간장으로 양념한 닭꼬치구이를 곁들여 내면 시원한 면과 어우러지는 한상 차림이 된다. 여기서 꼬치구이는 필히 석쇠에 구워야 한다.
꼬치에 닭과 대파를 번갈아 끼우고 석쇠에 올려 굽는다.
이 때 양념을 붓으로 잘 발라주면서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물론 오래도록 다려낸 간장을 만들기가 조금은 번거롭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여기저기 다용도로 사용되니 한번의 노력쯤은 해 주는 것이 맛있는 요리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김상영 푸드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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