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하는 민주화 시위가 일상적이던 198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는 보도블록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깨뜨려 '짱돌'로 만들어 진압 경찰에게 던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대신 차가운 회색 시멘트가 모든 보도를 뒤덮으면서 대학가의 분위기는 한층 암울해보였다.
취업난이 더 걱정인 요즘 대학에서 과거 같은 격렬한 시위문화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보도블록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대학생에게는 보도블록이 민주화의 추억을 떠올리게 할지 모르지만, 많은 국민들에게는 예산낭비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있다.
▦ 길을 가다 보면 도로를 파헤친 채 멀쩡한 보도블록을 뜯어내고, 새로운 블록으로 교체하는 기막힌 광경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예산낭비 사례로 기획예산처에 가장 많이 접수되는 신고도 보도블록 공사다.
특히 연말이 되면 기승을 부린다. 올해 쓰지 못하고 남은 불용예산을 털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4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 지자체 당 한해 평균 1,600건의 공사를 했다. 이 가운데 37%는 11월과 12월에 집중됐다. 그 아까운 예산을 불우이웃 돕기에는 왜 사용하지 못하는지 답답하다.
▦ 건설교통부가 이러한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 10년이 되지 못한 보도블록은 원칙적으로 바뀌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처음 만들었다. 보도블록의 내구연한이 대개 9년~11년임을 감안한 조치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러한 규정이 여태까지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보도블록 공사 남발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조치로 불필요한 예산낭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다행이다. 무엇보다 황당무계한 공사를 지켜보면서 국민들이 받을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만 해도 의미가 있다.
▦ 최근 일본에서는 도요타자동차 간부 출신들을 공공기관의 책임자로 모셔가는 영입바람이 한창이라고 한다. 히라노 유키히사(平野幸久) 전 사장이 주부(中部) 국제공항 사장을 맡아 당초 예산(7,680억 엔)보다 15%가 적은 금액으로 2005년 최첨단 공항을 완공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이 촉매제가 되었다.
도요타식 근검절약 정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공공공사 예산에 그만큼 거품이 심각하다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또 다시 쓸데없는 보도블록 교체공사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라 예산낭비신고센터(1577-1242)에 신고라도 하자.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