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사진 속에서 갓 마흔이었던 어머니는 무릎위로 앙증맞게 올라간 미니원피스 차림이었다. 아마도 어린이날을 맞아 소풍을 갔던 것 같다.
오른쪽 어깨에는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메고, 왼쪽에는 초등학생부터 유치원생까지 네 남매를 쪼르륵 세운 채 활짝 웃고있는 어머니의 옷이 당시 유행하던 피나포어 드레스(pinafore dressㆍ에이프런 스타일의 소매없는 미니원피스)라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 알았다.
그렇다. 1970년대에 이미 그토록 당당했던 그녀들의 미니사랑이 과거 속에 영원히 봉인됐다고 단정할 근거가 뭐란 말인가. 요즘 인기절정인 미니원피스, 40대 아줌마라고 못 입을 이유 없다.
뉴 포티(New Forty)는 과감하다
미니는 청춘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록 짧은 치마아래 드러난 다리가 20대 처녀처럼 싱싱하지 않다 해도 패션은 도전하는 자의 것. 더구나 ‘몸짱’ 열풍은 40대를 언뜻 보기엔 30대 만큼 젊게 만들었다.
㈜형지어패럴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는 최선미씨는 “요즘 40대는 몸매 관리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마인드 에이지(mind ageㆍ마음 나이)에 따라 옷을 선택한다. 중년의 체형에 맞춰 피팅만 다르게 할 뿐 유행을 받아들이는 감각과 속도는 젊은이들 못지않다”고 말한다.
여성복브랜드 크로커다일레이디의 주부 피팅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채정란(45ㆍ중랑구 신내동)씨는 대표적인 미니 애호가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있지만 등산과 걷기, 골프로 단련한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는 채씨는 “20대 때는 오히려 주변의 눈을 의식했지만 나이 들고부터는 또 언제 입어보겠나 싶어서 과감하게 입기로 했다”고 말한다.
패션에 대한 40대의 열정은 소비지표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패션정보사 퍼스트뷰코리아가 최근 발표한 자료는 새로운 소비 주도층으로 ‘뉴 포티(New Forty)’, 즉 패션과 미용에 과감히 투자하는 40대 여성을 꼽았다. 패션 제품 소비에 있어서 지난 3년간 20대 여성의 지출이 꾸준히 줄어든 반면 40대 여성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 참조.
그러니 ‘아줌마’이기에, 유행에 관한한 늘 뒷전이었던 그녀들이 미니에 열광한다고 해서 ‘주책’ 이라고 눈 흘기지 마시라. 그녀들에겐 권리가 있다.
허리는 잊어라
중년의 미니원피스 도전시 첫번째로 고려해야할 사항은 허리선이다. 최씨는 “될수록 허리선을 강조하지 않는 스타일을 고르라”고 조언한다. 아무래도 나잇살이 있는데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이라면 뱃살이 붙게 마련이라 허리를 강조하면 뚱뚱해 보인다.
다행히 요즘 유행하는 1960년대식 트라페즈(어깨부터 A라인으로 떨어지는 미니원피스)나 하이웨이스트(허리선을 가슴 밑으로 끌어올린 것) 원피스는 허리선을 없애거나 높이는 방식으로 복고적이면서 우아한 멋을 강조해 중년 여성들이 선택하기에 알맞다.
소매 밑단에 주름을 잡아 봉긋하게 부풀린 벌룬 스타일은 어깨에 포인트를 주어 시선을 끌어올리므로 키가 커보이는 효과도 있다.
레이어드를 활용하라
미니원피스 아래 레깅스를 받쳐 신거나, 긴 니트 풀오버에 7부 크롭트팬츠를 받쳐입는 식의 레이어드(겹쳐입기)는 중년 여성들에게는 미니 스타일을 가장 편안하게 연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송희영 샤트렌 디자인실장은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 등 중년여성들이 자신 없어 하는 부위는 다 가리면서도 초미니 원피스를 입는 즐거움은 만끽할 수 있는 효과적인 연출법”이라고 귀띔한다.
미니원피스 위에 볼레로나 베스트를 덧입어주면 세련된 느낌이 더하다. 단 레깅스는 둔탁한 편직 보다는 신축성이 좋은 스타킹 소재를 고르는 것이 다리가 날렵해 보인다.
하이힐은 필수다
최씨는 미니원피스를 입을 때 중년 여성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로 ‘낮은 단화에 만족하는 것’을 든다. “40대가 넘으면 대부분 허벅지가 두꺼워지기 때문에 하이힐을 신어서 허벅지 근육이 쭉 펴지도록 해야 다리가 날씬해 보인다. 그래서 하이힐은 미니 스타일링의 마침표와 같다”고.
구두 모양은 옷 스타일에 맞춘다. 소매가 봉긋하고 허리선이 없는 60년대식 원피스 라면 구두 앞쪽에도 두툼하게 굽을 댄 플랫폼 구두가 적당하다. 미니원피스에 스키니진이나 크롭트팬츠를 매치한 캐주얼 차림에는 요즘 유행하는 실버나 금속성 색상의 샌들을 곁들인다.
■ 주부 피팅모델 채정란씨
"옷을 너무 좋아해서 피팅모델이 된 것 같아요."
미니원피스 모델로 나선 주부 채정란씨는 벌써 2년째 피팅모델(fitting modelㆍ옷의 패턴이나 사이즈를 몸에 맞도록 교정하는 작업에 기용되는 사람)로 활동하고있다.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즐기는 패션애호가. 아르바이트 주부모델 오디션에 간다는 친구를 따라 나섰다가 덜컥 본인이 붙었다. 보통 피팅모델은 알음알음 소개를 통해 선정된다.
"날씬하면 못 뽑혔을 거예요. 40대 이상이 주고객인 브랜드이니까 피팅모델도 주부가 해야 옷이 현실감 있다고 해서 배도 좀 나오고 군살도 있는 40대 골격을 가진 사람을 뽑거든요."
말은 그래도 14년 전부터 시작한 골프로 다진 몸매가 퍽 탄탄하다. 163cm에 54kg, 옷 사이즈 66. 무엇보다 골반이 바르고 어깨 높이가 일정하면서 좌우대칭이 정확해 '인간 마네킹'으로는 최적이라고 회사 관계자는 귀띔한다.
좋아하는 옷 원 없이 입을 수 있어 시작했지만 보기보다 피팅은 중노동이다.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피팅작업이 끝날 때 까지 하이힐을 신은 채 꼼짝도 못하고 서있어야 한다.
장장 6시간을 서있던 적도 있다. "패션모델처럼 걷기라도 하면 덜 힘들 텐데 이건 가만히 서있으니까 막판에는 피가 아래로 쏠려서 발이 터질 것 같아요." 패턴 상태의 옷을 입고 벗거나 핀으로 옷의 여분을 잡으며 수정하는 동안 옷핀에 찔리기도 부지기수다. 팔뚝 곳곳에 점점이 난 불긋한 점들은 대부분 옷핀에 찔려 생긴 것이다.
보수는 하루 2시간에 5만원 정도다. 비정규직이지만 요즘처럼 일이 많을 때는 일주일에 거의 매일 4,5시간은 일하니까 돈벌이도 꽤 쏠쏠하다. 옷을 살 때 직원가 할인 혜택도 받는다. 다만 "견물생심이라고 옷 사느라고 남는 것도 없어요"란다.
무엇보다 가족이 모델 일 하는 아내와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기쁘다. "처음 피팅모델 됐다니까 남편이 '우리 마누라가 그렇게 잘났나?'하며 좋아해요. 오랫동안 전업주부로 살았으니까 이제 예쁘게 꾸미고 활동하고 그러는 것이 보기 좋다고요. 요즘은 아침 일찍 작업이 있을 때는 아침밥도 챙겨줍니다."
꿈은 피팅모델로 장수하는 것이다. 다행히 요즘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브랜드가 많아지는 추세라 40대 피팅모델을 찾는 곳이 꽤 돼, 몸관리만 꾸준히 하면 헛꿈은 아니다. "하루에 3시간 반씩 운동해요. 잘 먹고요. 주부 피팅모델은 살이 빠지면 혼나요. '아줌마 몸매' 유지하기도 쉽지않다니까요."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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