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수사나 P. R. G.(성은 첫 알파벳만 적기로 하자. 스페인 사람들의 정식 성은 두세 단어로 이뤄지는 것이 예사다)였다. 수사나는 1980년 그라나다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내 젊은 시절의 펜팔이었다. (‘펜팔’이라. 인터넷이 대중화한 시대에 이 말은 얼마나 고색창연한가!) 나는 1978년 말부터 다섯 해 남짓 수사나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로서는 그저 스페인어로 글 쓰는 걸 연습한다는 기분으로, 그러니까 다소 불순한 실용적 목적을 지니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편지가 오가면서 꽤나 진지한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수사나는 프랑코가 죽은 뒤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는 스페인 민주주의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유신정권의 말기적 광증과 짧았던 서울의 봄, 그리고 거기 이은 길고 혹독한 겨울에 대해 얘기했다. 수사나에게 편지를 부칠 때마다, 혹시 그 편지가 검열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멀거렸다. 그러나 스페인어를 읽을 줄 아는 검열관까지 둘 만큼 군사정권이 치밀하지는 않으리라는 이성적 짐작으로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수사나는 내게 미겔 데 우나무노의 시들을 적어 보냈고, 제 동향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예술과 삶을 자부심에 차 얘기했다. 나는 그녀에게 김지하라는 이름을, 김민기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상대의 생일이나 제 나라 명절 때가 되면 그리 값비싸지 않은 선물을 주고받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얼마 뒤, 우리의 편지 주고받기는 끝났다. 내가 그녀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자 그녀 쪽에서 편지를 끊었다. 기분이 좀 묘했다. 나는 수사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여자친구 얘기를 여러 차례 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뒤, 나는 수사나에게서 받은 편지를 죄다 불태웠다. 그것은 아내에게 건넨 일종의 ‘충성 맹세’ 같은 것이었다. 요즘, 그 짓이 후회된다. 젊음이 아쉬울 나이가 돼서 그런지 모른다. 지금 그 편지를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적어도 옛 젊음을 기분 좋게 반추할 수는 있을 게다.
수사나와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 언젠가 스페인에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그라나다는 너무 멀어보였다. 그 시절, 해외여행은 잘난 사람에게만 베풀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그라나다에 처음 가 본 것은 1993년 5월이다. 혼자였고, 일로 한 여행이었다. 세비야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 지나니 그라나다였다.
버스는 휴게소에서 한 번 쉬었는데, 휴게소의 한 카페에서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알람브라궁전의 추억> 을 되풀이해 내보내고 있었다. 아마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기타 연주였을 게다. 그 때, 요동친(트레몰로!) 것은 기타의 현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줄이기도 했다. 알람브라궁전의>
그라나다를 두 번째로 찾은 것은 2004년 11월이다. 탕헤르에서 알헤시라스로 돌아온 친구들과 나는 그 길로 철학자가 모는 차를 타고 알람브라궁전의 도시로 향했다. 이번엔 부러 차 안에서 <알람브라궁전의 추억> 을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러나 마음의 ‘트레몰로’가 예전 같지 않았다. 세월은 모든 뾰족한 것을 무디게 만드는 것인가. 알람브라궁전의>
처음 그라나다에 갔을 때, 나는 줄곧 수사나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를 굳이 찾아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그라나다에 갔을 땐, 친구들과 지지고 볶느라 수사나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세월이 그녀의 삶에 큰 상처를 내지 않았다면, 초로의 수사나는 어디선가 의사 노릇을 하고 있을 게다. 내겐 10대 후반의 그녀 사진이 있다. 이건 불태우지 않았다. 사진 속의 그녀는, 하, 정말 미인이다.
그라나다에 두 번째로 갔을 때, 플라멩코를 처음 실연으로 보았다. 알바이신 구역의 한 동굴이 공연장이었다. 11월의 밤, 알람브라궁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동굴에서 무희들의 숨결을 받고 있자니, 문득 나도 안달루시아 집시 사회의 일부분이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 친구들과 나를 포함해 그 동굴을 그득 채우고 있던 관람객들은 죄다 그라나다 바깥에서 온(사실은 스페인 바깥에서 온) 이방인일 터였다.
무희들의 몸짓도 가수들의 목소리도 짙은 성애(性愛)의 암시로 눅눅했다. 무희 다섯과 남자 무용수 하나, 연주자 둘, 가수 둘이 돌아가며 또는 함께 공연을 했는데, 놀라워라, 쉰이 넘어 보이는 중년 무희의 춤사위(라는 말을 서양 춤에 써도 되는진 모르겠으나)가 가장 매끄러워 보였다. 세월이 모든 뾰족한 것을 무디게 만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라나다는 아름다운 도시다. 수사나가 그리 자랑스러워 했던, 이 도시가 낳은 가장 유명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제 고향을 이렇게 찬미했다. (가르시아 로르카의 고향은, 정확히는, 그라나다시가 아니라 그라나다주의 푸엔테바케로스다.)
“그 빛깔은 은색, 진한 초록빛/ 라 시에라, 달빛이 스치면/ 커다란 터키 구슬이 되지/ 실편백나무들이 잠 깨어/ 힘없는 떨림으로 향을 뿜으면/ 바람은 그라나다를 오르간으로 만들지/ 좁다란 길들은 음관이 되고/ 그라나다는 소리와 빛깔의 꿈이었다네.”
여기서 시에라란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뜻한다. 아니, 시에라 자체가 산맥이라는 뜻이니 네바다산맥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라나다는 네바다산맥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과달키비르강의 지류인 다로강과 헤닐강이 바로 이 도시에서 합류한다. 가르시아 로르카는 이 세 강을 노래한 <세 강의 발라드> 라는 시에서 과달키비르강을 “오렌지와 올리브 숲 사이로 흐르는” 강으로, 다로강과 헤닐강을 “눈(雪)에서 흘러내려 밀한테 가는/ 그라나다의 두 강”으로 묘사한 바 있다. 세>
그라나다 사람들은 제 도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는 그라나다의 장님”이라는 말도 한다. 그라나다가 지닌 이 아름다움의 절정은 알람브라궁전이다.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까지 한 세기에 걸쳐 세워진 알람브라는, 아마 타지마할을 제외하면, 인간이 만든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일 테다.
그 아름다움에는 슬픔과 퇴락이 배어있다. 아름다움은 흔히 슬픔이나 퇴락을 내장하기 마련이라는 상투적 맥락이 아니더라도,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은 그 슬픔과 퇴락을 역사에서 제공받고 있다. 알람브라궁전은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이었던 그라나다왕국(나스리드 왕조)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은 사멸 이전의 찬란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이 겪은 패망은 무슨 옥쇄 따위가 수반된 비장한 것이 아니었다.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가 함께 다스리던 기독교 스페인이 그라나다 왕국을 멸한 것은 1492년이지만, 이슬람 스페인의 중심 코르도바가 기독교인들에게 함락된 1236년 이래 그라나다 왕국은 일찌감치 카스티야의 속국이 되는 길을 택했다. 마지막 이슬람 왕조는 존속 내내 불안정한 상태였던 것이다.
마침내 기독교 부부 군주가 그라나다마저 차지하기로 마음먹고 이 도시에 입성했을 때, 나스리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아부 압둘라(정식 이름은 무함마드12세이고 스페인 사람들에겐 보통 ‘보압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궐 밖으로 나와 두 기독교 군주에게 굴복의 입맞춤을 하고 제 왕국에서 쫓겨났다.
그가 남쪽으로 달아나며 마지막으로 제 왕궁을 바라보았다는 곳은 오늘날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el ultimo suspiro del Moro)이라고 불린다. 보압딜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의 페스로 달아나 거기서 죽었다.
아름다운 궁 알람브라를 차지한 기독교 부부군주가 거기서 처음 한 일은 소위 알람브라칙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 칙령에 따라 모든 유대교도들이 스페인 영토 바깥으로 쫓겨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스페인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이 개종자들은 뒷날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이라는 것이 유행하면서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또 이 칙령은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억지로 기독교를 믿도록 강압했다. 개종을 거부하면 죽음이 따랐다. 이로써 이베리아반도의 종교는 기독교 일색으로 통일됐다. 기독교도 지배자들은 무슬림 지배자들보다 종교적 관용이 훨씬 모자랐다.
알람브라궁전에도 그 뒤 기독교의 흔적이 보태졌다. 16세기 들어 이슬람 양식의 궁전 옆에 세워진 카를로스5세궁전이 그것이다. 카를로스5세(독일어식으로는 카를5세)는 상속의 행운을 통해서 스페인 왕과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한 합스부르크가 군주다. 그가 다스린 영역은 스페인과 중부 유럽 전체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와 나폴리를 거쳐 대서양 건너 남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스페인 식민지)에 이르렀다.
몽골제국 전성기의 ‘칸’을 제외하면, 카를로스5세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군주였다. 그가 제 이름을 붙여 알람브라에 세운 궁전은 그 자체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한 전범이라 할 만하지만, 주변의 이슬람풍과는 어쩔 수 없이 분위기가 어긋나 있다.
알람브라에는 또 한 사람의 기독교인을 위한 공간이 있다. ‘어빙의 방’이다. 이 기독교인은 카를로스5세와 달리 알람브라의 구원자였다. 어빙은 <스케치북> 의 작가 워싱턴 어빙을 가리킨다. 스케치북>
스페인 정부의 무관심으로 19세기 초까지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알람브라를 새롭게 발견한 이가 어빙이었다. 그가 스페인의 미국 공사관에서 일하며 쓴 <알람브라> (1832)는 이 웅장하고 화사한 이슬람 건축물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며 대대적인 정비와 개보수(改補修)의 계기가 되었다. 알람브라>
사람들이 그라나다라는 도시에서 제일 먼저 떠올리는 곳은 대개 알람브라궁전이다.
그러나 내겐 그에 앞서 아세라델다로라는 거리가 떠오른다. 혹시 그라나다에 갈 기회가 있다면, 그 길을 으눼으?걸어보시라. 다로강 허리께서 푸에르타레알(왕의 문)을 향해 서쪽으로 뻗어 있는, 널따란 길이다.
‘다로강으로 가는 보도(步道)’라는 길 이름이 뜻하듯,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다. 인사동길 같은 좁다란 길이 아니라 대학로보다 넓은 한길에 사람들만 오간다. 93년에도 04년에도, 그 길에 서 있으면, 혹시 마약을 할 때의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싶게 몽롱해졌다. 그저, 사람들로만 그득한 대로가 낯설어서였겠지. 그 사람들 가운데 혹시 수사나가 있었을까?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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