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임진왜란 초기 영의정으로 국정의 최고 책임을 맡았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서거한 지 400년 되는 해다. 12일 추모제에는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 이여송(李如松)의 후손들이 와서 3국 화해의 자리를 만든다고 하니 더더욱 감회가 깊다.
따지고 보면 임란은 어처구니없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1년 전부터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황이 분명했는데도 정부에서는 당파가 나뉘어 쳐들어온다느니 아니라느니 집안싸움만 하고 있었다.
■ 지금 생각해도 울화가 치민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나라가 무방비 상태로 침략을 당한 와중에도 몇몇 걸출한 인물이 나와서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서애는 그런 분들 중 맨 앞자리를 차지할 인물이다.
허겁지겁 달아나는 선조 임금을 모시고 피난을 간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개전 초기 명나라를 참전시키려고 그 쪽 인사들에게 읍소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뇌물을 주기도 하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는 서애의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 스승인 이황이 그를 한번 보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내렸다"고 했다는데 과연 퇴계의 지인지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바야흐로 임진년과 계사년에 왜구가 곳곳에 깔리고 명나라 군대가 성에 가득하던 날, 급한 보고가 한창 오가고 공문서가 번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연려실기술>
공이 관청에 도착하면 속필인 신흠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입으로 부르면 글이 되는데 여러 장의 글을 풍우처럼 빨리 부르므로 붓을 쉬지 않고 썼지만 한 자도 고칠 것이 없이 찬란하게 문자를 이루었다.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 또한 그러했으니 참으로 기이한 재주였다."
■ 그런 서애도 밤이면 이여송 장군이 부채에 써 보낸 시를 읊으며 시름에 잠겼다. "(명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강을 건너니/ 삼한(조선)이 편안치 못해서라네/ 임금(선조)께서 날마다 군사 오는 소식 기다려/ 신하들은 밤에도 술잔을 들지 못했네/ 봄 들어 살기는 더해도 마음은 오히려 굳건한데/ 이 요사한 기운을 제거하자니 등골 벌써 서늘하리/ 담소간에 큰 소리 친다고 이기는 것 아니건만/ 꿈에도 언제나 말 타고 달린다네" 그의 흉중이 어떠하였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서애가 다시 살아나 요즘 정치인들이 다투고 싸우고 때리고 할퀴는 광경을 본다면 그 흉중은 또 어떠할까?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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