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러워지는 방식으로, 문학의 갱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심리적ㆍ문화적 차원에서의 정치성이니까요. 큰 정치는 허위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광호(44)씨의 말은 게오르그 루카치의 고전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를 패러디하고 있었다. 지난해 발표한 비평집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을 통해 1990년대 문학 양상을 징후적으로 포착, 탈정치ㆍ탈리얼리즘 논의로 제18회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았다. 이토록> 문제는>
대학 총학생회의 한총련 탈퇴가 하나의 추세처럼 굳어지고, 한미FTA의 실익을 이제는 적극적으로 바라보자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는 현 시점은 책의 통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책의 표현을 빌면 ‘더 이상 폭로할 것도, 분노할 것도 없는 세계, 낯선 정보 사회 환경과 자본적 일상의 비속함 가운데서, 문학은 스스로의 존재 위치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 문학의 ‘잡스러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한다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여러 양상 가운데 창조적 잡스러움, 의미 있고 새로운 문학을 하는 사람을 점검해 내는 비평적 과제에 더욱 충실해야죠.”
이 맥락에서 책은 일련의 젊은 작가군에 방점을 찍는다. “욕망의 희극성에 착목한 김애란, 무국적 하드 고어의 B급 영화적 이미지로 문학의 영역을 새롭게 하는 편혜영 등이 특히 주목됩니다.”
여러 문학상과 출판 시장 등에서 확인되는 바, 아직 새 문화 권력으로까지 대두하지는 못한 그들에 대한 당부는 각별하다. “중요한 것은 갱신을 향한 끊임 없는 노력이에요. 현 상황에서 안주한다면 당연히 비판 받겠죠.” 한유주 등 역동적인 후발 작가들의 분발이 가만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첨언이다.
‘더럽혀진 이름’ 386, ‘역사적ㆍ공동체적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와의 접속을 통해 성장한’ 포스트 386, 그리고 ‘아예 저항과 위반의 전선 자체가 설정될 필요조차 없는’ 2000년대 문학. 그렇게, 우리 시대 문학은 연동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고 책은 지적한다.
“글쓰기란 개인적 자유를 최대치로 밀고 나가는 행위예요. 문학이 어차피 문화의 메이저가 아닌 시대, 오히려 그래서 자유로운 거죠.” 글쓰기란 운명적으로 시장과 당대의 문학적 관점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지만, 눈치 보지 않는, 자의식적 글쓰기를 비타협적으로 밀고 나가라는 요청이다.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로 편혜영 황병승 등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을 길러내기도 한 그는 “문학은 영구 혁명”이라고 강조한다. 시장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불온한 요구에 그들이 충실해 주기를 바란다. “문학적 실존이란 그런 거예요.” ‘왼쪽으로, 보다 왼쪽으로’라고 그는 주문했다.
“노벨상 때문에 대가들의 해외 소개에 치중하는데, 그 같은 상징 권력에
매달릴 필요는 전혀 없죠. 콤플렉스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니.” 그것은 꾸준한 번역 작업 등 해외의 인정을 받기위한 지속적 노력과는 별개의 문제라
는 지적이다.
■ 심사평-구성·시선 배분·폭넓은 관심, 균형 뛰어나
지난 한 해 동안 비평계의 수확은 양도 풍성한 편이 아니었지만 질에서도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 명백하게 드러나는 비평계의 이 사기 저하는 인문학의 전반적인 퇴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비평은 다양한 창작활동의 열정이 인문학적 성찰로 이어지는 제일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문학 창작 활동의 빈곤과 인문학 위기의 책임이 일정 부분 비평계의 무기력함과 나태에 있다는 뜻도 함축한다.
진지한 작업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심사권에 들어온 상당수의 저작들이 아무런 비평적 통찰력도 보여주지 못한 채 늘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하거나 고식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대상 작품들의 진실을 오히려 은폐ㆍ왜곡하고 있었다. 또한 비평가의 사적 인상이 비평적 통찰력과 혼동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광호씨의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은 그 제목이 말해 주듯이 개별적이고 사소한 일상의 정치성에 기생하는 문학적 정치성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대립시키기' 혹은 '리얼리즘과 민족문학과 한국근대문학을 등치하기'라고 하는 지배적 도식을 넘어서서, 미적 근대성의 개념을 둘러싼 한국문학 내부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학적 모더니티의 실상과 전망을 문제 삼아 얼핏 혼란스럽게 보이는 문단의 풍경에 하나의 구도를 마련하고 있다. 이 비평집은 '입장' '징후' '명명' '맥락'으로 나눈 그 구성에서도, 시와 소설에 향하는 시선의 배분에서도, 젊은 문인들의 다기한 경향에 대한 폭 넓은 관심에서도 뛰어난 균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점이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일치시키는 데 크게 힘을 발휘하였다. 이토록>
심사를 마친 심사위원들에게는 한 가지 강한 의문이 남는다. 왜 우리의 비평가들은 자기의 일을 전문화하기도 전에 정치적 전위이건 미학적 전위이건 항상 무엇의 전위가 되려 하며, 왜 항상 한국문단 전체를 관통하여 말하려 하는가?
수상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 심사위원 > 유종호 김윤식 김병익 황현산
■ 심사경위-비평계의 예고된 적막… 최단시간에 결정
요즘의 우리 비평계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우리 비평계의 전통이 되다시피 한, 신예들이 대가를 공격함으로써 입지점을 구축하던, 주목받기 위한 소란스러움 마저 최근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작품에서 화제를 끌어내고, 독자들을 작품에 주목하게 만들어야 할 비평의 역할이 너무 침체되어 있다. 우리 문학사를 돌이켜보면 비평이 활기에 넘쳤던 시기와 정론적 성격의 비평이 가장 많이 생산된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일제시대, 해방 직후, 유신시대, 광주사태 이후에 생산된 이념적 비평들이 바로 그 예들이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 문학 논쟁, 순수참여 논쟁, 민중문학 논쟁, 노동문학과 당파성 논쟁 등은 작품을 중심으로 한 비평 행위라기보다 현실참여에 대한 지식인의 시비 가리기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따라서 1990년 이후의 우리 비평계에 찾아온 적막은 예견된 사태였다. 비평이 정론적 성격을 벗어나 문학과 문학작품에 대한 담론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모색과 시련의 과정은 겪지 않을 수 없는 운명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적막함을 지금 우리는 맛보고 있는 것이다.
18회 팔봉비평문학상의 심사대상에 오른 평론집의 총수는 36권이었다.
소장 국문학 연구자들의 과외 비평 활동을 보여주는, 연구서적인 책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2000년대 전반기와는 달리, 최근의 평론집들은 비교적 현장비평에 어울리는 감수성과 문체를 구비한 것들이긴 하지만, 본격적 검토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책들은 많지 않았다. 유종호 심사위원장을 포함해서 김윤식, 김병익, 황현산 네 분 심사위원들이 4월 18일의 1차 본심에서 5명의 후보자를 손쉽게 골라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4월 30일에 열린 2차 본심은 지금까지의 심사 중 결정에 이르는 시간이 가장 짧게 걸린 회의였다. 유종호 위원장의 권유로 세 분의 심사위원이 각자 판단한 평론집 제목을 말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젊음의 힘이 보인다고 평가한 이광호의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을 18회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대해 어떤 불만도 불평도 없었다 이토록>
홍인기 기자 hongi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