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소년은 7세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조건은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기에 여의치 않았다. 작은 체구에 이민 2세인 소년은 프랑스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이름조차 이국적인 냄새가 강한 ‘니콜라 사르코지’. 그럴수록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려는 사르코지의 열망은 커져 갔다.
꿈을 키운지 45년, 중도 우파인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르코지(52)는 6일 프랑스 5공화국의 6번째 대통령으로 마침내 이름을 올렸다. 정통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외부조건보다는 능력과 비전을 선택한 프랑스 국민 모두의 승리였다. 집권 우파의 세 번째 연속 집권이라는 의미도 첫 전후 세대, 최초의 이민 2세대의 대통령 탄생이 갖는 의미를 따라가지 못했다.
사르코지는 19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전후 프랑스로 이민 온 헝가리 귀족 출신 부친과 그리스계 유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5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유대인 의사인 외조부 밑에서 성장했다. 당시 어려운 환경이 사르코지를 ‘아웃 사이더’로 느끼게 했고, 강한 권력욕은 여기서 비롯됐다. 어머니 앙드레는 “아들은 드 골 대통령이 재직하던 7세 때 대통령 꿈을 꾸었다”고 기억했다.
사르코지는 10대에 우파 정당의 밑바닥에서부터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28세 때인 1983년 파리 교외 뇌이쉬르센 시장에 당선된 그는 특유의 수완과 달변, 추진력으로 야심을 이루기 위한 경력을 밟아갔다. 시장 시절 유아원 인질범을 직접 설득해 사건을 해결하는 대담함도 보였다.
사르코지는 처음에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 계파에 속해 성장했다. 그의 막내딸과 사귀면서 ‘시라크의 정치적 아들’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95년 대선에서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를 지지하면서 시라크와 멀어졌다.
2002년 시라크가 당시 총선 승리의 일등 공신인 자신을 총리가 아닌 내무장관에 기용하자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제로 톨레랑스(무관용)’ 정책을 불도저식으로 추진, 대중의 인기를 넓혀갔다. 시라크의 견제가 사르코지를 거물로 만든 셈이다.
카리스마와 과감한 추진력, 직설적 발언은 사르코지 당선자의 인기비결이자 약점이다. 때문에 개혁주의자가 아닌 야심가이자 독설가이며 친미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2005년 내무장관 시절 시위 이민자들을 향한 ‘폭도’ 발언으로 ‘파리 폭동’의 빌미를 제공했다.
당선이 확정된 6일 밤 반(反) 사르코지 시위에는 화염병까지 등장했다. 그는 당선 일성으로 “모든 프랑스인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지만, 자신에 대한 극단적 거부감은 집권 내내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뒤를 이어 ‘부시의 새로운 푸들’이란 조어가 벌써 등장했다.
사르코지 당선자는 7일 가족과 함께 묵상과 기도로 대통령상을 모색하는 3일간의 피정(避靜)을 떠났다. 9일이나 10일께 파리로 돌아와 내각 명단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태규 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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