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건 마을 터지 인심은 아니라에.”
고향은 엄마 뱃속처럼 늘 아늑하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필 무렵이면 꿈도 따라 익었다. 신동임(64ㆍ울산 신정1동)씨의 고향은 오래 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80가구가 옹기종기 정을 나누던 경북 울주군 삼동면 둔기마을이 1969년 대암댐 건설로 수몰됐기 때문이다. 향학열을 불태우던 공부방도 청년들이 술잔을 기울이던 사랑방도 물에 잠겼다.
그런데 매년 5월이면 다행히 물을 피한 동네 뒷동산에 이상한 플래카드가 내걸린다.‘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향은 넘실대는 푸른 물 아래 보이지도 않는데 실향민들은 플래카드 아래로 모여든다.
올해 5일도 마찬가지였다. 71년부터 그랬으니 37년째다. 400명이던 귀향인원도 자손이 번창하면서 올해는 1,000명을 넘어섰다.
신씨 역시 한해도 귀향을 거르지 않았다. 그는 “올해는 어린이날을 맞아 사위랑 초등학생 손주까지 10여명이 왔다”며 “아이들이 할아버지 고향을 발로 딛을 순 없지만 고향의 정을 느끼기엔 충분하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5일 둔기마을 뒷동산은 하루종일 울리는 풍악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고향 주민끼리 푸는 회포소리로 왁자했다.
세상살이도 빠듯한데, 하물며 사라진 고향을 찾는 둔기마을 주민들의 애정은 친목 모임인 ‘둔기회’가 모태가 됐다. 하지만 오랜 세월 거르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영산 신(辛)씨 집성촌인 둔기마을에서 나고 자란 신격호(85) 롯데 회장의 지원 덕분이다.
400년 역사를 지닌 고향이 물에 잠겨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던 신 회장은 71년부터 해마다 5월이면 옛 고향 친지와 주민들을 자신의 둔기리 별장으로 초청해 소와 돼지를 잡고 소주와 막걸리도 풍성하게 내놓았다.
장기자랑과 체육대회도 마련해 실향의 아픔을 달래게 했다.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각별하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형제들이 자란 둔기마을을 늘 잊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을 매달 오가는 ‘현해탄 경영’,‘셔틀(Shuttle, 왕복) 경영’을 하면서도 연초와 귀향잔치 때는 꼭 마을 뒷동산에 둥지를 튼 둔기리 별장을 찾을 정도다.
그는 올해도 어김없이 5일 오전 가족들과 성묘를 다녀온 뒤 오후 4시께 잔치에 참석해 고향 주민들과 안부를 나눴다. 신 회장의 동생 신준호 롯데햄우유 회장과 신선호 일본산사스 회장 등도 참석했다.
둔기 주민들은 롯데가 마련한 과자선물세트 소주 양산 등 기념품과 여비로 15만원어치의 선물도 받았다. 롯데는 부근의 삼동초등학교에 수학여행비와 장학금 등도 지원하고 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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