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국민화합기원 대법회에서 "된(힘든) 고비는 넘어간 것 같다. 분위기가 참 좋다. 입이 째지려고 한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듣고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뭘 하면서 국록을 먹는지 궁금해 청와대 홈페이지인 '청와대 브리핑'에 들어가 봤다.
최근 2~3일새 날짜와 시간대 별로 조금씩 바뀌었으나 중심엔 '정치, 이렇게 가선 안됩니다'가 큰 문패로 걸렸고 이어 '한나라당의 인질정치로 국가손실 수조원'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 대통령이 대선 주자들과 야당에 던지는 쓴 소리란다. 경쟁력 있는 복지국가가 참여정부의 목표이고 그 토대를 만든 게 치적이라는 대법회 연설문도 눈에 띈다.
그리고 홍보수석실 정무팀 등의 이름으로 언론의 '상투적인' 해설과 표현, 반론보도의 '반칙'을 공박하는 글들이 경쟁하듯 배열돼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가져올 미래는 홈페이지를 환히 밝힌다.
● 경제 빠진 대통령의 정치강의
'청와대 브리핑'이 원래 그런 게지, 하고 여기면서도 '그토록 큰 대의명분과 나름의 전략을 가진 집단이 왜 세력을 얻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정권이 진보의 본뜻을 잘 살려 균형 잡힌 사회를 만드는데도 왜 70%나 되는 국민들이 등을 돌리느냐는 말이다.
왜 대통령은 입이 째지게 좋은 봄날을 맞았느냐는 말이다. 정치권을 향해 리더십 강의를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데도 국민들은 왜 배고프다고 난리냐는 말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서면 답이 나온다. 대통령은 '복지투자가 곧 경쟁력'이라며 참여정부 들어 복지지출이 예산의 20%에서 28%로 높아졌다고 한다. 대신 경제사업 분야는 29%에서 17%로 줄었다.
좀 비약하면 덜 벌면서 더 썼다는 뜻이다. 공적자금 상환 등 다른 변수가 있긴 하지만, 국가채무가 5년 새 두 배로 늘어 국민총생산(GDP)의 34%인 300조원에 근접하고 적자국채도 50조원 가까이 늘어난 것은 그 영향이다. 그러나 복지 확충만 말할 뿐, 미래에 떠넘긴 빚이나 돈 씀씀이의 효율성에 대해선 말이 없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연 평균 4%대 초반의 성장률이 말하는 경제 역동성의 상실이다. 대기업 총수들이 언급한 '샌드위치론'의 심각성과 '제조업 재무장론'의 필요성은 최근 2년 새 주요기업의 영업이익률이 반토막 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사정이 이러니 대기업의 은밀한 하도급 횡포에 시달리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좀비' 중소기업이 급증하고, 벤처의 토양이 허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고용시장을 쳐다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일자리는 투자와 함께 참여정부가 최악의 성적표를 낳은 부분이다. 200만 명을 넘는 실질적 실업자도 그렇지만, 비정규직이 임금근로자의 50% 안팎에 달할 만큼 고용의 질이 나빠지고 창의성보다 안정성이 직업선택의 최우선 기준이 된 것은 투자부진 이상으로 국가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그나마 국가예산을 쏟아 부어 공무원을 5만 명이나 증원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 고단한 민생엔 장밋빛 福音만
부동산 광풍은 확실하게 잡았다고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에서 잇달아 울리는 '가계 발 금융위기' 경보음을 듣다 보면 이것도 수긍하기 어렵다.
주택담보대출 등으로 크게 늘어난 금융부채, 경기침체와 교역조건 악화로 인해 제자리 걸음한 실질소득, 주택가격의 급속한 하향세와 금리부담의 가중 등이 묘한 시점에 맞물리면서 가계와 금융의 동반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에 이른 까닭이다. 정부가 뒤늦게 금융을 점검한다며 소란을 피우는 게 왠지 수상쩍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원칙대로 가고 있다"고 자신하며 이젠 정치판을 뒤흔들고 싶어 한다. 편하게 국록을 먹으면서 자리를 탐하는 집단이 아니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언행이다. 정부는 지금 한미 FTA의 마약에 취한 듯 '젖과 꿀이 가득한' 내일의 복음만 되뇐다. 입이 째지게 좋을 국민이 많을 법도 한데, 모두들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