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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불우한 천재들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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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불우한 천재들의 자취

입력
2007.05.0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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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유작 한 점에 34억 원이나 호가하는 국민화가 박수근, 그에 못지않게 신화적 인기를 누리는 이중섭, 한국의 로댕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권진규, 그리고 단 한 권의 시집으로 시대를 바꾼 시인 이상.

이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모두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우리의 근ㆍ현대 예술계를 풍미했지만, 살아 생전에는 가난에 찌들대로 찌들어 불우한 일생을 마감한 이들이다. 이중섭은 가난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두 아들과 부인을 일본의 처가로 보내 죽을 때까지 생이별했으니, 궁핍 때문에 생긴 옛 기러기 아빠였다.

● 근대 유산 살리는 등록문화재

이런 형편들이니 변변한 집 한 채 가질 수 없었고, 그나마 남긴 초라한 판잣집마저 대개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기념관은커녕 그들을 기억할 땅 한 뼘이 없다.

설혹 남겨진 집이 있다 하더라도, 지지리도 가난한 그들의 집이 오죽했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국가가 매입하여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 관리하는 것이겠지만, 사정이 이러하니 '당대를 대표할 만한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있는'문화재로 지정되기는 불가능했다.

이에 비해 친일파의 거두 윤덕영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 호화찬란한 서양식 주택을 지어 살았고, 그 옥인동 송석원(松石園)의 가옥은 일찍이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이 불우한 천재들의 유적을 보존할 길을 연 것이 바로 등록문화재 제도이다. 누상동 이중섭의 집과 통인동 이상의 집,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는 이미 등록문화재가 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박수근과 신동엽의 주택은 등록문화재 지정이 예고되어 있다.

기존의 지정문화재는 그 제작수명이 최소한 80여년은 지나야 하고,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충분한 건조물만 문화재로 지정된다. 일단 지정되고 나면, 외관의 개조는 물론 내부의 개조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문화재 주변의 건축물들은 일정한 고도 제한을 받게 되어 문화재 소유자나 이웃집에는 재산상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실제로 문화재위원회에 참여해 보면, 이 위원회가 소위 문화와 역사를 지키는 위원회인지, 부동산 투기개발을 억제하기 위한 위원회인지 회의가 들 때가 많다. 어떤 소유자들은 문화재 지정 자체를 무효화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하고, 특히 재개발지역에 위치한 문화재에 대해서는 주변 주민들의 지정 철회 압력이 대단하다.

물론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서는 개발 압력과 싸워 나가는 것이 당연할 일이지만, 이상의 집과 같이 역사적 사실만 의미가 있고 건조물 자체가 별 볼일 없을 때는 문제가 심각하다.

이를 문화재로 지정할 근거가 희박할 뿐더러, 주변 주민들에게 이 보잘 것 없는 집을 위해 재산권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제안된 제도가 바로 등록문화재 제도이다.

등록문화재는 개항기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근대시기의 유물이 대상이 되면, 예술적 학술적 가치 뿐 아니라 역사적 기념적 가치만 있어도 가능하다.

내부를 개조하여 현대적 생활에 이용할 수 있으며, 주변 대지에 대해서도 고도 제한 등 규제를 없애거나 완화해 준다. 이미 미술계의 고희동 배렴 이상범의 주택이 등록문화재로 보호 받고 있으며, 홍난파 이광수 박종화 등의 주택도 등록되어 있다.

● 사명감이 문화와 역사 지켜

국가적인 보존 노력과 발맞추어 민간의 보존 노력도 대단하다.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을 기념하는 김수근 문화재단은 철거 위기에 처한 이상의 집을 구입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한 국민단체를 표방하는 내셔널 트러스트는 최순우 옛집을 구입 개조해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물론 민간에서 정성과 돈을 모아 문화재를 매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를 활용하고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명감이 이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지키는 게 아닐까? 이상이 그랬고, 박수근이 그랬듯이.

<저작권자>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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