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 교육실. 고령자 재취업지원 프로그램인 ‘성공실버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설명만을 듣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 시간, 프로그램 참가자 중 최고령인 심영호(65)씨가 앞에 나와 강사가 보여준 그림을 설명했다. 나머지 참가자들은 심씨의 설명에 따라 그림을 그려 나갔다.
잘 못 알아들은 것이 있어도 질문은 할 수 없다. 그리는 쪽도 설명하는 쪽도 답답하긴 매 한가지다. 교육실은 어르신들의 한숨 소리로 요란했다.
설명이 끝나고 서로의 그림을 비교했다. 12명 참가자들의 그림은 모두 달랐다. 심씨가 설명한 것과 똑 같은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심씨가 “아니, 설명을 코로 들은 거야 입으로 들은 거야”라고 큰 소리 쳤다. 심씨 옆에 앉은 마정기(60)씨가 맞받아친다. “도대체 설명을 코로 한 거야 눈으로 한 거야.” 교육실은 금세 즐거운 웃음바다다.
이 한바탕 웃음은 성공실버 프로그램 중 ‘젊은이와의 대화법’을 배우는 시간에 나온 것이다. 구직에 나선 어르신들이 일자리를 찾는 과정에서나 또는 취업한 뒤 직장 내에서 젊은이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돼 겪게 될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기 위해 마련됐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센터 소속의 유명희 직업상담원은 “질문 없이 설명만 듣고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질문 하면서 그리는 것이 더 정확한 그림이 된다”며 “대인 관계 갈등은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푸는 게 가장 기본”이라고 말했다.
‘경청하기 역할놀이’ 시간에는 참가자들이 2인 1조가 됐다. 처음 3분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지하게 들어준다. 다음 3분은 상대방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
미리 정해놓고 하는 놀이인데도 참가자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상당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남편 박영식(58)씨와 한 조가 돼 역할놀이를 한 김경희(55)씨는 “아무리 놀이라지만 남편이 내 말에 딴청을 피울 땐 심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초등학교 행정교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퇴직한 남편 박씨는 “젊은이들이랑 얘기할 때 종종 내 생각과 다르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듣는 척만 하거나 무시해 버렸다”며 “앞으론 좀 더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경청해야 겠다”고 말했다.
젊은이와의 대화법 배우기는 ‘나 전달법’ 강의로 이어졌다. 예컨대 “자네 사람 못 쓰겠구먼. 어른인 내게 어찌 그렇게 말을 하나” 대신에 “자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내가 서운하네 그려”라는 식으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야 효과적인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게 강의의 주된 내용이다.
마정기씨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는 “나 전달법은 현실에선 실천하기 정말 힘든 것 같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데 세상 어느 누가 ‘자네 때문에 기분 상했네’라며 차분하게 나 전달법으로 말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버릇없는 젊은이는 호되게 야단쳐야지 좋은 말로 그냥 봐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지난해 KT에서 희망 퇴직한 한경원(55)씨는 “홧김에 바로 폭발하지 말고 한번 더 생각해 말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지 뭐”라고 말했다.
유 상담원은 “나 전달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현실에서 불가능한 건 절대 아니다”며 “나이가 많다는 것을 무기로 직장 내에서 젊은이들을 무조건 윽박지르고 가르치려고 하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일 뿐이니 나 전달법을 많이 연습하라”고 조언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참가자들 "이런점이 좋았어요"
성공실버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만족도는 높다. 이들은 “같은 처지끼리 웃고 즐기다 보면 교육 5일이 눈깜짝할 새 지나간다”며 “거의 모든 강의가 직접 참여식으로 진행돼 더 유익했다”고 말한다. 참가자들의 소감을 들어 봤다.
A(69)씨-프로그램 들은 뒤 아파트 경비를 하고 있는데 아파트 주민이나 관리사무소 직원들을 상대할 때 강의에서 배운 ‘젊은이와의 대화법’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B(67)씨-교육을 받고 난 다음부터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취업도 포기했었는데 다시 의욕을 얻었다.
C67)씨-내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삶에 대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취업 여부를 떠나 생활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D(62)씨-고령자 취업 프로그램을 여러 가지 들어봤지만 가장 실질적으로 도움된 교육이었다.
E(62)씨-유익한 정보를 많이 얻었고 고령자로서 어떻게 자신 있게 살아갈 지에 대해 크게 배웠다.
F(61)씨-나만 어려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능동적으로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G(58)씨-잘 나가던 과거에 얽매였던 내가 부끄러웠다. 눈높이를 낮추고 언제든 일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깨끗이 할 것이다.
H(56)씨-처음엔 별 기대 없이 왔는데 같은 처지 사람들끼리 웃고 떠들다 보니 너무 재미 있게 유익했다. 5일간의 교육이 너무 빨리 끝난 것 같아 아쉬웠다.
■ 성공실버 프로그램은…유연한 사고 큰 도움 구직연결 아직 미흡
박경우(70)씨는 2월 노동부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실시한 성공실버 프로그램을 듣고 한 달 뒤 예식장 전문 주례사로 재취업했다. 칠순의 고령임에도 5일간 실시된 교육을 통해 얻은 자신감이 큰 힘이 됐다. 박씨는 “젊은이와의 대화법, 화 다스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장유유서(長幼有序) 문화에 갇혀 있던 나를 돌아보고 유연한 사고를 갖게 됐다”며 웃었다.
성공실버 프로그램은 재취업을 원하는 고령자에게 자신감을 높여주고 구직 기술을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이다. 만 55세 이상을 대상으로 2월부터 각 지역의 고용지원센터에서 실시하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과 성신여대가 공동 개발했다.
재취업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취업과 관련한 딱딱한 지식이나 기술만 배우는 건 아니다. 인생곡선 돌아보기, 건강자가진단, 건강체조, 자신의 강점 발견, 직업 탐색, 이력서 작성, 면접 요령, 젊은이들과의 대화법, 화 다스리기, 구직 걸림돌 극복 방법 등 주로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치매검사도 한다. 닷새 동안 매일 5시간씩 12~15명이 참여한다.
참가자들의 호응도는 높다. 고용정보원이 지난해 190명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 한 뒤 벌인 설문조사에서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을 들은 뒤 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고 우울했던 감정도 많이 사라졌다”고 답했다.
아쉬운 점도 있다. 프로그램 참가가 곧바로 구직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고용정보원의 노경란 취업콘텐츠팀 부연구위원은 “이는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기 보다는 고용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라며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이 곧바로 취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우리 사회의 큰 과제”라고 말했다.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의 유명희 직업상담원은 “프로그램을 듣고 자신감을 얻은 분들이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다시 기가 꺾이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서울 지역에서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를 비롯해 강남, 관악, 서부 고용지원센터에서 격주로 운영한다. 나머지 센터들은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인력 부족 문제로 분기별로 실시한다. 프로그램 참가 신청은 각 지역 고용지원센터(1588-1919)나 워크넷(www.work.go.kr)에 하면 한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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