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헤르의 도로표지판에는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위아래로 적혀 있었다. 이 도시에서 프랑스어가 두루 쓰인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랬다. 선착장에 늘어서서 호객 행위를 하는 자칭 ‘공식’ 가이드들은 프랑스어로 말을 건네 왔다. 그 점을 가장 반긴 것은 철학자였다. 혼잣말인 듯 그가 “아, 여기선 불어가 통하네” 라고 했을 때, 그 말에선 어떤 해방의 기쁨이 묻어났다. 해협 건너 안달루시아에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 꽤나 불편했던 모양이다.
철학자는 젊은 시절 독일에서 공부했는데, 부전공으로 미술사 공부를 겸한 덕인지 프랑스어에도 능하다. 학부 과정부터 독일에서 다시 시작하느라 라틴어나 옛 그리스어 같은 고전어까지 기웃거렸다는데, 스페인어를 익힐 기회는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페리보트에서 불과 두 시간을 노닥거리자, 철학자 앞에 갑자기 ‘말귀 알아들을’ 세계가 펼쳐졌다. 해방감을 느낄 만도 했다.
낯선 대륙의 문턱을 넘어선 지 얼마 안 돼, 내 친구들과 나는 이 도시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랍어와 프랑스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탕헤르의 거리에선 갖가지 언어가 나풀거렸다. 하긴, 1956년 모로코에 통합되기 전까지 이 도시는 열강의 제국주의적 욕망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던 ‘영세중립’의 국제 도시였다. 가이드가 아니더라도, 이 도시 사람들은 아랍어와 프랑스어만이 아니라 스페인어와 영어로도 간단한 말쯤은 주고받을 줄 알았다. 우리가 짐작할 수 없었던 언어들은 또 얼마나 많았으랴.
이 도시의 국제성이 20세기 몇십 년 동안의 중립 도시 지위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테다. 2,500 년 전 카르타고인들의 손길을 받아 세워진 이래 탕헤르는 헤아리기 어지러울 만큼 주인들을 자주 바꿔왔다. 탕헤르의 역사는 지중해 제해권의 교체 역사이기도 했다. 로마제국, 반달족, 무슬림, 포르투갈, 스페인, 잉글랜드, 프랑스 등 여러 세력이 이 도시에 머물며 제 흔적을 남겼다. 1905년에는, 모로코에서 프랑스가 누리는 지배적 지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탕헤르를 방문해 모로코 술탄을 싸고도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유럽의 두 나라가 거의 개전에 이를 뻔한 적도 있다. 영국이 프랑스 편을 듦으로써 그럭저럭 마무리된 이 사태가 소위 제1차 모로코사건(탕헤르사건)이다.
우리는 무슬림 문명 안에 있었다. 넓은 의미의 아랍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아프리카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 거리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하라사막 이북의 아프리카와 그 이남의 아프리카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사하라 이북 아프리카는 ‘검은 대륙’이 아니다. 인종적으로 남쪽과 달리 베르베르인과 아랍인이 살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유럽사의 한 부분이었다.
이 지역을 유럽인들은 흔히 마그레브(또는 마그리브)라 부른다.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같은 나라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짜’ 아프리카가 아니라 마그레브에 발을 들여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고대 유럽인들이 아시아라고 부른 지역이 지금의 서남아시아였듯, 그들이 아프리카라고 부른 지역도 지금의 북아프리카, 곧 마그레브였다.
마그레브는 아랍어로 ‘해가 지는 땅’ 곧 서쪽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그 동서를 나누는 기준은 나일강이다. 나일강 서쪽, 사하라 이북을 마그레브라 부르는 것이다. 반면에 그 동쪽 지역은 마슈리크(또는 마슈레크)라 부른다. ‘해 뜨는 땅’ 곧 동쪽이라는 뜻이다. 나일강 동쪽, 아라비아반도 이북의 아랍어 사용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나일강이 관통하는 이집트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가 모호하다.
마그레브라는 말로 북아프리카를 두루 가리키는 것은 주로 유럽인들의 관행이다. 아랍 사람들은 이 말로 대개 모로코를 가리킨다. 모로코 사람을 포함한 아랍인들에게 모로코의 정식 이름은 ‘서쪽 왕국’이라는데, 이 때 서쪽이 바로 ‘마그레브’(의 형용사 형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 친구들과 나는 마그레브 중의 마그레브에 발을 디딘 셈이다. 탕헤르는 그 마그레브의 마그레브로 들어가는 입구다.
탕헤르는 스페인어식 발음이다. 아랍어로 이 도시는 ‘딴자’에 가깝게 읽힌다. 프랑스어로는 ‘탕제’다. ‘탕헤르’라는 스페인어식 이름이 동아시아에서 일반화한 것은 이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배타적 위세를 누렸던 외세가 스페인이기 때문일 테다. 1923년 프랑스, 스페인, 영국 세 나라가 합의해 국제 지역으로 선포한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스페인의 점령 아래 있었다. 유럽 대륙이 전쟁으로 정신 없는 틈을 타, 프랑코가 탐욕을 드러낸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탕헤르는 중립적 국제도시의 지위를 되찾았다.
이 도시의 자식 가운데 가장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은 14세기 이슬람 율법학자이자 여행가 이븐 바투타일 것이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중국에 이1瘦沮?11만여㎞에 이르는 거리를 30년 동안 여행했고, 이븐 주자이라는 동시대 문장가에게 제 여정을 구술해 당대 문명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인문지리서를 남겼다. 본디 제목이 <도시들의 진기함과 여행의 경이를 눈여겨본 자에게 주는 기록> 인 이 여행기는 흔히 <리흘라> (기록, 일지의 뜻)라 불린다. 구술자 자신의 상상에 바탕을 둔 픽션이 뒤섞이기는 했겠으나, <리흘라> 는 이븐 바투타와 거의 동시대인이었던 마르코 폴로의 <일 밀리오네> 와 더불어 중세 말기의 동서 문명을 비교 시각에서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일> 리흘라> 리흘라> 도시들의>
이븐 바투타말고도 탕헤르를 문화사 속으로 이끈 사람은 많다. 그것은 여러 문명과 제국주의 세력이 이 도시에서 각축을 벌였다는 사실과도 부분적으로 관련 있을 테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와 앙리 마티스, 미국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와 폴 볼스, 시인 앨런 긴즈버그 같은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살았거나 머물렀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 속에 탕헤르의 풍경을 녹여내 이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탕헤르는 19세기 이래 국제 스파이들이 암약하는 도시로도 이름을 얻었다. 영국인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007 시리즈의 몇몇 영화가 탕헤르를 부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의 예로는, 맷 데이먼이 주연한 <본 슈프레머시> 가 탕헤르를 이야기의 첫머리로 삼았다. 본>
영화 007 시리즈가 설핏 보여주는 탕헤르는 화사하다. 그러나 우리가 본 이 도시는 어수선했고, 더 나아가 남루했다. 탕헤르는 우리가 두 시간 여 전에 떠난 스페인에 견줘 살림이 어려운 나라의 도시라는 점이 또렷했다. 선착장만이 아니라 거리 어디에도 자칭 ‘공식’ 가이드와 뜨내기 상인들이 바글거렸다. 상인인지 야바위꾼인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들, 걸인인지 소매치기인지 모를 사람들이 주위를 얼쩡댔다. 뜨내기 상인들이든 버젓해 보이는 상점 사람들이든, 그들이 부르는 값은 대체로 바가지였다. 흥정을 하다 보면 반값 이하로도 깎아주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것을 알려준 것은 현지인 가이드였다. 친구들과 나는 탕헤르 거리를 무작정 걷다가 잠시 의논한 끝에 가이드를 쓰기로 결정했다. 한 눈에도 이방인이 분명한 네 남녀에게 끊임없이 다가와 스토킹을 일삼는 ‘공식’ 가이드들을 일일이 물리치기도 번거로웠던 데다,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효율적으로 이 도시를 둘러볼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우리의 가이드는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지닌, 다리가 좀 불편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카스바 구역의 한 가게에서 우리는 가죽 슬리퍼와 지갑 따위를 샀는데, 무함마드가 눈짓으로 오케이 사인을 할 때까지 값을 계속 깎았다. 어쩌면 더 깎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함마드와 그 상점 사람들은 동족일 뿐만 아니라 서로 아는 사이일 게 분명했고, 우리는 그 도시에 잠시 머무는 이방인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무함마드는 아마 적절한 선에서 상점 사람들과 우리에게 동시에 호의를 베풀었을 게다.
무슬림 세계에선 무함마드라는 이름이 왜 그리 흔한지. 가장 위대한 프로 복서 가운데 한 사람일 알리도 이 예언자의 이름에 제 이름을 포갰다. 굳이 비유하자면,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제 이름으로 삼는 격일 테다. 중남미나 스페인 출신의 스포츠 선수나 예술가 가운데 ‘헤수스’(‘예수’의 스페인어식 이름)라는 이름을 지닌 이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이슬람세계에서처럼 널리 퍼진 관행은 아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제 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 자체를 불경스럽게 여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기독교인과 예수의 관계가 무슬림과 무함마드의 관계와 나란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주류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기도 하니 말이다.
힘센 나라의 공사관 건물이나 미국인 출판재벌 맬컴 포브스가 세운 포브스박물관 따위의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화사함을 뽐내긴 했으나, 내 눈에 비친 탕헤르는 대체로 남루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역사가 오래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17세기 거의 그대로라는 카스바 구역을 걸으며 나는 이 도시의 두 얼굴을 실감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엉켜있는 있는 그 곳엔 사치와 궁상의 냄새가 버무려져 있었다. 그 곳 한켠에, 인도-이슬람 풍경의 한 전형으로 이방인들의 뇌리에 자리잡은 뱀 장수도 보였다. 친구 하나는 돈을 건네고 뱀과 기념 촬영을 하고 싶어했으나, 다른 친구가 만류해 그만두었다. 그 친구는 탕헤르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내내 힘들어했다.
그랑소코(‘큰 시장’이라는 뜻) 구역의 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자니, 문득 서울 한남동의 모스크 생각이 났다. 한남동 모스크 근처에도 이런 아랍 찻집이 있다. 우리는 무함마드와 한 모스크 앞에서 헤어졌다. 그는 예배를 드릴 참이었다. 라마단 기간이어서 탕헤르 구시가의 식당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창가에 검정고양이가 앉아있는, 신앙심 부족한 식당을 찾아내기까지 우리는 꽤 걸어야 했다.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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