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열린 한 금융회사의 이사회. 새 사업 전략의 적법성을 두고 이사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금융감독원에 사전 유권해석을 받아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섣불리 추진했다가 나중에 낭패만 볼 수 있잖아요.” “금융감독원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 명쾌한 해석을 내려 준 적이 있나요.” “비조치의견서 제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글쎄, 회사 전략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거라서….”
금융감독 당국이 ‘투명한 금융감독’을 기치로 금융회사가 법규 위반 여부를 질의해올 경우 사전심사를 하는 ‘비조치의견서(no action letter) 제도’를 도입한지 6년. 2001년 5월 증권 분야에 처음 도입해 2005년 7월부터 전 금융권으로 확대했지만, 금융회사의 이용 실적이 거의 없는 허울좋은 제도로 전락했다.
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비조치의견서 제도 도입 후 6년간 금융회사가 이 제도를 이용한 경우는 4건에 불과했다. SK 대우 동부 등 증권사 3곳이 각각 한 번씩 비조치의견을 받았고, 보험사 중에는 교보생명이 유일하게 1건의 의견을 받았다. 그나마 향후 법적 조치가 완전 면제되는 금융감독위원장 명의의 회신은 1건이었고, 나머지 3건은 구속력이 약한 실무 국장급 명의의 회신이었다.
특히 지난해 10월 제도 활성화 조치를 취한 후에는 아예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금융회사가 청구서를 서면이 아닌 전자문서로 제출할 수 있게 하고, 여러 부서의 의견이 필요한 경우 일괄 회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제도 활성화 방안을 마련했지만 실효성이 없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감독 정책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비조치의견서 제도를 적극 운영하고 있다”고 홍보했으나 정작 수요자인 금융회사로부터 외면을 받은 셈이다.
취지도 좋고, 금융회사의 수요도 많지만 이 제도가 정착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공개주의 원칙’에 있다. 제도운영규칙에 따라 금융감독 당국은 금융회사의 청구서에 회신을 한 후 10일 내에 감독당국 홈페이지에 반드시 게시해야 한다. “모든 금융회사에게 동일한 원칙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계 관계자는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절실히 필요하지만 회사 이름과 영업 전략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적용 대상이 다소 협소하다는 지적도 있다. ▦금융감독 법규가 아닌 법규 위배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행위 ▦예비인가에 해당하는 행위 ▦검사 또는 심의가 진행 중인 행위 등을 제외하는 등 예외 대상이 많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선진국에서는 이미 활성화한 제도인 만큼 금융회사 실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개선해야 한다”며 “제도가 활성화하면 금융감독의 투명성도 높이고 금융회사의 비용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비조치의견서 제도
금융회사가 신규 영업이나 상품 개발 등 특정 행위를 하기 앞서 금융감독 법규 위반 여부를 금융감독 당국에 묻고, 당국은 해당 행위의 법규 위반 여부를 회신한 뒤 이에 대해서는 향후 법적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는 제도다. 사후 제재를 통한 비효율성을 없애고 감독 정책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활성화해 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