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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무대다] <18> 코막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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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무대다] <18> 코막중공업

입력
2007.04.3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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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부를 건 중국 현지법인이 무너졌다. 건설 장비와 부품에는 온통 노란 압류딱지가 붙었다. 매정한 세상은 잔고 한푼 없는 통장에도 딱지를 붙였다. 차마 직원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몹쓸 짓을 했구나…누굴 원망하리. 그래, 죽음으로 갚자.'

생을 포기하려고 마음을 먹으니 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밤잠을 설치다 서늘한 기운에 문득 눈이 떠졌다. 아내(40)가 병 수발을 하고 있었다. "여보, 몇일 밤낮을 나 땜에 꼴딱 샌 거요." 애처로운 아내는 '당신이 더 힘들잖아요'라고 눈으로 대답했다.

퍼뜩 정신이 났다. '이런 아내와 직원들을 두고 죽을 순 없지. 다시 시작하자.' 삶의 지푸라기를 부여잡듯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2003년 조붕구(42) 코막(KOMAC)중공업㈜ 사장에게 벌어진 일이다. 그는 어떻게 자살의 문턱에서 재기에 성공했을까.

구걸은 해도 양보 못하는 게 있다

전 직원을 불러 모았다. 조 사장 자신이 먼저 사표를 썼다. "오너지만 능력이 없으면 다 넘기고 끝내겠다. 여러분도 애정을 갖고 열심히 하다 안되면 문 닫고 끝내자는 각오로 일합시다." 조 사장의 말에 공감한 직원들도 사표를 냈다. 어차피 월급도 못 주는 처지였다.

사표 뭉치를 들고 60여 곳의 협력업체 사장을 닥치는 대로 만났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빚진 거 갚고 기필코 회사를 살리겠습니다. 한번만 도와 주십시오."

다행히 주문이 들어왔다. 그날 이후 매일 야근을 했다. 80명에 달하던 직원은 17명으로 줄었다. 관리직을 포함한 남자 13명은 공장에 남아 철야 작업을 했다. 담석제거 수술을 받으려고 입원했던 직원이 현장에 나와 힘을 보탰다. 일주일이 지나자 4명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조 사장과 직원들의 회생 노력을 본 협력업체는 부채를 3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해줬다. 힘을 얻은 그는 곧바로 빚을 내 해외로 떠났다. 주문을 받거나 돈을 빌리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어려움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은 게 있다. 바로 연구 개발이다. '기계는 정직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그는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음에도 2000년 설립한 기술연구소 직원을 한명도 줄이지 않았다.

2005년 그의 고집은 결실을 맺었다. 자체 개발한 고성능 유압 브레이커 '토르(Tor)' 시리즈가 국제특허 출원을 받았다. 유압 브레이커는 유압해머로 암반이나 콘크리트 구조물을 부수는 장비. 코막의 토르는 공타(空打) 방지 모델 등 독창적인 기술로 진화하며 세계시장의 호평을 받고 있다. 덕분에 지난해 50%의 매출 신장을 이뤘고, 빚도 다 갚았다.

지난해엔 호주 딩고사와 손잡고 미니 로더(Mini Loaderㆍ다목적 작업차량)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니 로더는 다양한 부속장치를 달면 지게차 불도저 파쇄기 굴삭기 등으로 변신하는 복합형 꼬마 중장비. 그는 "작지만(1톤 이하) 강력한 힘(23마력)을 지닌 녀석을 내세워 틈새시장을 공략하겠다"고 강조했다.

시련을 통해 얻은 교훈

무엇보다 그는 절망 속에서 지혜를 얻었다. '사람이 기업의 근본'이라는 교훈이다. 그는 "기업활동을 해서 남는 건 돈이 아니라 좋은 고객, 좋은 직원, 좋은 협력업체 사람"이라고 했다. 특히 망해가는 회사를 지키며 일한 직원들을 잊지 못한다.

이 때문에 직원 교육비는 아끼지 않는다. 매일 새벽 외국인 강사를 초빙해 영어교육을 하고 공장에서 페인트 칠하는 직원에까지 매달 책을 한 권씩 사준다. 올해 하반기엔 엔지니어링 분야 경영을 할만한 직원을 뽑아 해외연수를 보낼 참이다. 그는 "애써 일하는 직원들이 행복하도록 해주는 게 최고경영자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품질과 신뢰만이 경쟁력'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꾸준한 연구 개발로 무장한 제품이 없었다면 그는 나락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올해 매출 목표는 155억원(경상이익 15억원). 소형 중장비 분야 세계 1위가 되겠다는 꿈(현재 10위)도 되찾았다. 전세계에 깔린 코막의 유압 브레이커 7,000대가 자신감의 원천이다. 독자 기술 및 디자인 개발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창업하기 직전인 1997년 어느날의 파리를 잊지 못한다. 그날 그의 독백은 이랬다. '한국을 대표하는 중장비 회사를 만들자. 이름은 한국 기계(Korea MachineryㆍKOMAC).' 그는 오늘도 주먹을 불끈 쥔다.

안산=고찬유 기자 jutdae@hk.co.kr사진 안산=김주성기자 poem@hk.co.kr

■ 코막중공업은

코막중공업㈜은 유압 브레이커, 유압펌프, 크라샤(콘크리트 파쇄기) 등을 수출하는 건설중장비 전문업체다.

1997년 12월 조붕구 사장은 구로공단에 홀로 월세 20만원짜리 사무실을 열었는데, 그것이 코막중공업의 출발이었다. 그는 "타이어 기계설비 등을 수출하는 회사의 나이지리아 주재원을 거치면서 건설중장비의 미래를 봤다"고 창업 배경을 설명한다.

자체 기술도, 부하 직원도 없던 때라 해외에서 중장비 부품 도면을 그려와 국내 전문가에게 외상으로 부탁해 도면을 다시 만들 정도로 영세했다.

정성과 발품을 들인 덕에 98년 1월 요르단 노르웨이 등에 유압 브레이커의 핵심 부품인 '치즐'(심)을 수출하게 됐다. 월 2,000만원 선이던 주문은 차차 억대로 성장했다. 그 해 4월 독일 중장비박람회에 기계 부품을 출품한 뒤엔 이스라엘과 칠레 시장에도 진출했다.

99년에는 총수출 320만 달러에 총매출 40억원을 달성했다. '이 달의 무역인상'도 수상했다. 2000년 코막의 유압 브레이커 360대가 드디어 미국 땅을 밟았고, 까다롭다는 유럽시장도 개척했다. 전세계 40여개 국에 코막 이름으로 중장비 및 부품 13종류를 수출했다. 2001년 시화공장 준공, 2002년 중국과 유럽 현지법인 설립 등으로 승승장구 했다.

2003년 중국 현지법인이 무너지면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지만 조 사장과 직원들의 투혼으로 슬기롭게 대처했다. 재기에 성공한 코막은 'ISO9001:2000' 인증을 받고 세계 각국의 중장비 전시회나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해 2005년 고성능 유압 브레이커 '토르(Tor)' 시리즈와 환경장비 '트리스(TRIS)'를 개발해 각종 특허를 따냈다. 2006년엔 험지(險地)형 지게차(RTTF)와 다목적 꼬마 중장비인 미니 로더(멀티 디거ㆍK9_3)를 국내시장에 선보였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좌절을 맛보게 했던 중국시장에 재도전하고 있다. 현재 코막이 진출한 국가는 50곳이 넘는다.

코막은 2003년 사태를 잊지 않고 "품질 가격 신용은 바른 길 외에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삼불(三不) 타협의 원칙을 내세워 세계무대를 공략하고 있다.

사진 김주성기자 poem@hk.co.kr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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