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법 시스템이 선진화의 첫걸음을 뗐다.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 제정안’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은 과거 53년간 이어온 형사사법 시스템의 골간을 바꾸는 대수술이다. 때문에 국회 논의 과정에서도 진통이 컸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심야에 국회 법사위원과 담판을 짓고 있는데 검찰 입장을 설명하러 온 검사장들과 마주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법원은 선진적인 사법시스템 도입이라는 명분을 강조했고, 검찰은 제도 변화의 허실을 짚은 현실론을 앞세워 치열한 로비전을 벌였다. 그 결과 당초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 안에서 후퇴한 내용이 적지 않다. 일부 제도는 아예 도입이 보류됐다. 하지만 검찰에서 법원으로의 ‘사법 권력’ 이동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국민참여재판 제도 도입
사법 사상 처음 형사재판에 배심원 참여가 허용된다. 법원 입장에선 재판 권한의 일부를 국민에게 나눠 준 셈이다.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긴 위해선 기득권도 내놓아야 한다는 게 사개추위 정신이었다. 우선 법정 구조부터 바뀐다. 재판부가 앉는 법대 옆에 비스듬히 2층 구조의 배심원단석이 만들어진다. 미국 법정의 모습과 닮았다. 살인 및 부패범죄 등 피고인이 희망하는 사건에 한해 7~9명의 일반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관할 법원 거주 주민 가운데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하는 배심원단은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본 뒤 심리가 끝나면 독자적으로 유ㆍ무죄에 관해 평의를 열고, 양형에 대한 의견도 개진할 수 있다. 판사가 반드시 배심원 의견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판장은 판결 선고 때 배심원 평결결과를 고지하고 배심원 평결과 다른 판결을 선고할 경우 그 이유를 기재해야 한다.
재정신청제도 대상 확대
재정신청제는 검찰이 불기소 처리한 사건을 법원에 다시 심리해달라고 요청하는 제도다. 현재 ▦공무원 직권남용 ▦불법체포 감금 ▦독직폭행 등에만 허용한다. 개정안은 모든 범죄로 확대하되, 고발사건은 제외하고 고소사건만 대상으로 삼았다. 불기소 사건에 대해 법원이 공소제기 결정을 내리면 검사는 공소를 제기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내리는 불기소 처분 취소 결정이 기속력이 없는 점과 구분된다.
기소 독점권을 누려온 검찰은 사개추위 때부터 반대했다. 가뜩이나 문제로 지적돼온 고소 남발을 더욱 부추길 수 있고, 피고소인의 불안정한 지위가 계속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사위 논의에서도 횡령, 배임, 사기 등의 재산범죄는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수정안이 발의됐으나, 결국 무산됐다. 대신 ‘떼쓰기 고소’의 폐해를 막기 위해 재항고제는 폐지했고, 재정신청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단심(單審)으로 종결하도록 했다. 또 수사기밀 유출이나 사생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심리를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
법원은 “상습 민원인이 대부분인 재정신청 사건을 떠 안는 게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신헌법 이전에는 모든 사건에 대해 재정신청이 가능했다. 법원이 잃어버린 권한을 되찾은 셈이며 검찰의 불기소 권한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법원의 권한이 강해졌다는 해석이 많다.
형소법 증거법칙 개정
조서(調書) 재판의 폐해를 극복하고 공개된 법정에서 모든 증거를 따져 유ㆍ무죄를 판단한다는 공판중심주의로의 전환과 맞물리면서 사개추위 때부터 검찰의 반발이 컸다. 우선 검찰의 조사상황을 기록한 영상녹화물은 그 자체로 증거능력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영상녹화물을 조서 대체 증거로 여겨온 검찰이 크게 아쉬워 한 대목이다. 대신 영상녹화물은 피고인이 신문조서를 부인할 때 보충적인 수단으로만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하지만 법사위 논의 과정에서 영상물 녹화의 근거규정이 참고인으로 확대되고, 피의자 동의 없이 고지만 해도 영상물 녹화가 가능하도록 한 조항이 신설됐다. 법안은 또 자의적인 영상녹화를 방지하기 위해 “조사의 개시부터 종료 때까지의 전과정 및 객관적 정황”을 담도록 했다.
조건부 석방제, 영장항고제는 도입 보류
논란이 컸던 영장 단계에서의 조건부 석방제도는 보류됐다. 이 제도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 공탁이나 보증금 등 금전적 조건 외에도 인(人)보증, 거주지 제한 등의 조건을 충족할 경우 불구속 수사를 받도록 한 것이다. 검찰은 “조기 석방으로 수사에 지장을 초래하고 오히려 돈 있는 사람만 풀려날 길이 열린다”며 강력 반대했었다. 논의 중간에 금전적 보증만이라도 남겨 제도를 살리자는 의견도 개진됐으나, 비금전적 조건이 없는 제도 도입은‘없는 것만 못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검찰이 법원의 영장기각에 제동을 걸기 위해 도입을 추진했던 구속영장 항고제 도입도 무산됐다. 사개추위 때 법원-검찰 간 ‘주고 받기’ 속에 두 제도를 도입키로 했던 탓이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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