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 명장(名匠) 이온숙(75ㆍ여)씨는 버릇처럼 두 손을 매만졌다. 미용사로 일하면서 손님 머리카락을 자르다 실수로 잘못 베어 숱하게 상처를 낸 곳이다. 그 많던 상처도 이젠 세월에 씻겨 나가 흔적도 없어졌지만 그에게 왼손은 여전히 아파도 기특하게 잘 참아준 고마운 존재다. 열 아홉 꽃다운 나이에 한국전쟁 와중에서 시작된 이씨의 56년 미용 인생은 바로 그 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씨는 30일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4월의 기능한국인이 됐다. 1986년 국내 최초로 짧은 머리를 멋진 긴머리로 연출할 수 있는 올림머리용 피스(밴드ㆍ리본 등 미용도구)를 개발하는 등 미용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월드헤어쇼 미용실과 미용사를 양성하는 명문직업전문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미용 전문 서적을 출간하고 있으며, 각종 미용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씨가 ‘가위’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51년이다. 서울 신광여고 3학년을 중퇴하고 그는 피난지인 부산의 대한군경원호고등기술학교 미용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참전한 덕에 군인가족 자격으로 무료로 학교를 다녔다.
그에겐 “그 동안 잘라낸 머리카락 수 만큼이나 많은 사연”이 있다. 미용을 평생 직업으로 택한 것을 “머리카락 한 개 만큼도” 후회 않는다. 물론 가위를 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 때마다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던 건 “나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는 2003년 기능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반열인 대한민국 명장(미용 분야)에 뽑혔다.
이씨는 58년 서울 용산구 후암동 시내에 미용실을 차렸다. 문을 연 지 며칠 안 돼 ‘미스 장’이라는 미용사가 실수로 초등학교 여학생의 귀를 살짝 베 피를 냈다. 학생의 엄마는 “커서 미스코리아에 나갈 앤데 어떻게 할 거냐”며 미용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씨는 곧바로 큰 병원 3곳에 들러 여학생의 귀를 보여줬다. 의사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엄마는 “책임지라”며 막무가내 였다. 이씨는 “결국 힘들게 엄마를 설득했기 망정이지 미용실 열자 마자 닫을 뻔했다”며 “그 때 사고 친 미스 장은 서울 압구정동에서 큰 미용실을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거의 평생을 지문이 없이 살았다. 퍼머약이 워낙 독해 지문이 지워졌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 퍼머 손님 3명만 받아도 약이 독해 지문이 다 없어진다”며 “주민등록증을 갱신할 땐 지문이 없어 동사무소에서 몇 번씩 퇴짜를 맞기도 했다”고 말했다.
소문난 미용사인 만큼 그의 미용실엔 장관 부인 등 저명 인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머리를 해주면서 ‘뉴스 거리’가 될 만한 많은 말을 들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고객의 말을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미용사는 손님의 입이 아니라 머리카락과 대화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그는 “친절을 핑계로 손님에게 수다 떠는 미용사들은 완전한 프로가 아니다”고 했다.
억척스럽게 미용을 위해 살아왔다. 1년 중 쉬는 날은 설날과 추석 당일 딱 이틀이다. 1남3녀를 낳으면서 출산 몇 시간 전까지 미용실에서 손님을 맞고, 매번 산후 조리 열흘을 안 채우고 가위를 잡았다. 돈 때문이 아니다.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과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씨는 “힘 닿는 데까지 내 기술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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