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위해 없는 병명도 만들어내국회의원·의사등 전방위 매수말라리아 등 신약 개발엔 눈감아
다국적제약회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대표적 히트 약품이 팍실이다. 우울증 치료제로 쓰이는 경쟁사의 제품과 성분은 동일하지만 이 회사는 팍실이 ‘사회적불안장애’를 치료한다며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의약품 승인을 얻었다.
회사측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적불안장애란 ‘문제가 될 정도의 수줍음’이란다. 이 회사의 제품담당 이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모든 마케팅 담당자의 꿈은 아직 정의되지 않았거나 아무도 모르는 시장을 찾아 개발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사회적불안장애라는 병명으로 이 꿈을 이뤘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보건과 건강의 증진’ ‘생명을 살리는 기업’ … 세계 제약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모토다. 인류 건강에 이바지하는 좋은 기업으로 포장하고 있는데 과연 실상도 그럴까. 미국의 보건정책 비판자인 마르시아 안젤 하버드대 의료사회학과 주임교수는 <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를 통해 다국적 제약회사의 위선과 탐욕을 폭로한다. 제약회사들은>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돈이다. 사기업의 이윤 추구는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연구 조작, 과장 광고, 공무원과 의사 매수 등을 통해 이뤄진다면 사정은 다르다. 현직 의사인 저자는 이를 ‘저질 코미디’라고 일갈한다.
책에 따르면 신약 개발을 기업 이념으로 내세우는 이들의 말부터가 거짓이다. 1998~2002년 FDA의 승인을 받은 415종의 약 가운데 혁신적인 약은 고작 14%였다.
나머지 76%는 관절염 및 고혈압 치료제 등으로 복용하지 않으면 당장 생명을 위협 받지는 않아도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윤을 보장해주지만 연구개발비의 비중이 낮은 복제약이다.
반면 말라리아, 수면병 등 열대병 치료제는 꼭 필요하지만 이들 약품에 대한 연구개발은 뒷전에 밀려나있다. 환자들이 너무나 가난해 약값을 낼 수 없는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가 제약업계의 이익에 편향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고혈압약인 노바스크의 안전성과 관련한 논문 70여 편을 조사했더니 안정성에 호의적인 보고서 저자의 96%가 제조사와 금전적인 거래가 있었다. 의사들에 대한 로비는 무차별적이다. 미국 내 제약업체의 판매담당자는 8만8,000명으로 미국 전체 의사 다섯명 당 한명 꼴이다.
로비 수단은 하와이 가족여행, 돈다발 등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 기업의 홍보마케팅 비용은 전체 매출의 30%를 넘고 홍보마케팅 분야의 인원은 연구개발(R&D) 인원보다 많다. GSK의 팍실의 사례에서 보듯 ‘병을 위해 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을 위해 병을 창조’하는 마케팅을 떳떳이 자랑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게다가 미국의회에서는 의원보다 많은 600여명의 제약업체 로비스트들이 활약하며 철저히 기업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책은 미국의 이야기이지만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로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그들의 시스템을 우리 의료계에 강요할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이들의 의지가 관철된다면 몇 년 전 발생했던 고가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사태가 또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역자인 소아과 의사 강병철씨는 “가진 자는 건강하게 오래 살고 못 가진 자는 의료의 혜택에서 소외되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사람들의 각성과 관심과 참여만이 이런 비극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르시아 안젤 지음ㆍ강병철 옮김, 청년의사 발행ㆍ 316쪽ㆍ1만3,000원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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