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고위 경제관료로서, 정치인으로서, 또 기업인으로서 다양한 족적을 남기면서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승만ㆍ박정희ㆍ최규하 정권을 거치면서 최고위직 관료를 역임했고, 이후에도 ‘TK’(대구ㆍ경북)의 정치적, 정신적 대부 역할을 해왔다.
먼저 경제관료로서 신 전 총리는 한국경제사에 한 획을 그었다. 성장일변도 경제운용의 부작용이 가시화하던 1970년대 말 개발연대식 불균형 성장전략을 종식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79년 경제기획원 부총리였던 그는 안정성장 기조로 경제운용을 전면 개편하는 ‘4ㆍ17 경제 안정화 시책’을 입안했다.
정부 간섭을 배제하고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하기 위해, 수출기업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가격통제도 해제했다. 대신 영세민 보호대책, 부동산 투기억제 등 개발연대의 과도한 불균형 성장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같은 정책 전환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철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정재석 당시 경제기획원 차관은 “박 대통령과 신 부총리간 줄다리기는 3~4개월 계속됐고, 특히 농촌주택 개량사업 예산축소에 박 대통령은 화가 났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때 박 대통령은 신 부총리가 해외 출장을 간 사이 4ㆍ17 대책 중에서 수출금융 축소를 빼도록 지시했고, 그의 경질까지도 고려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79년의 4ㆍ17 조치는 20여년간의 불균형 성장전략을 바로잡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평가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신 전 총리는 경제인으로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같은 경북 출신인 고 김성곤 쌍용그룹 설립자와 가까워 쌍용양회 사장을 지냈고, 역시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도 친분이 두터워 삼성물산 회장을 역임하면서 삼성의 원로 역할을 했다.
삼성의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승계되는 과정에서는 고 이 회장의 다른 자녀들을 설득하는 ‘킹 메이커’ 역할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치사에 있어 신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제-미 군정-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정치사에서 그는 늘 권력의 핵심과 양지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일본 상무성에서 근무하고, 해방 직전까지도 일본 본토의 군수성에서 근무한 경력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에서 부흥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하던 신 전 총리는 5ㆍ16 쿠데타 이후 3ㆍ15 부정선거 연루 혐의로 2년 넘게 옥살이도 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다시 공화당 의원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최규하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를 맡았던 신 전 총리는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박 전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하는 소신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슬퍼런 신군부 하에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5공화국 헌법을 주도했다.
신 전 총리가 TK의 대부 역할을 해온 데 대해서도 지역주의라는 비판이 많다. 신 전 총리는 전두환 정권에서 TK 출신 인사들과 신군부를 연결시켜주면서 입지를 굳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TK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신 전 총리를 만나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렇듯 신 전 총리는 한국경제사에서는 역사적인 평가를, 한국정치사에 있어서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쿠데타로 점철된 역사적 전환기의 진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비판이 많다.
유병률 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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