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을 하면서 만난 사람 가운데 또 한명 잊을 수 없는 이가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안정효 씨다. 안 씨는 내가 출판 일을 시작할 할 때도 이미 번역의 최고봉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약속이 정확한 사람이다. 그와 만나기로 하고 조금 늦게 나갔다가 두 번씩이나 혼이 난 적이 있다. 한번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갔더니 그래도 그가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정효 씨는 당시 한 달에 단행본 한 권을 번역하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번역은 자택에서 하며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는 번역에만 매달린다며 전화도 일절 받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에어컨이 드물어서 그는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작은 소반을 턱에 걸친 채 번역했는데 그렇게 20여분 찬물에 있으면 배가 우글거리고 새파랗게 질려 밖으로 나와 햇볕에 몸을 말리곤 했다고 한다.
김호근 관훈미술기획 대표의 소개로 만난 그에게 영국 산악인인 프랭크 스마이드의 <산의 환상> 을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 <산의 환상> 은 당대 최고의 번역가 솜씨에 정병규 씨의 뛰어난 북 디자인 실력이 결합해 모든 면에서 최고로 인정 받았다. 이 책은 근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독자들의 호응과 격려를 받고 있다. 산의> 산의>
안정효 씨의 부인인 박광자(충남대 독문과) 교수 역시 내게 큰 힘을 주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여류작가 말렌하우스호퍼의 <벽> 을 번역했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여주인공이 유리 같은 물체로 격리된 공간에서 홀로 사는 생활을 그린 책이다. 이화여대의 교재로 채택될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다. 벽>
안정효 씨는 <하얀전쟁> 으로 유명 작가가 된 뒤 번역에 더 이상 매달릴 수 없게 되자 곽진희라는 아가씨를 소개해주었고 그 뒤 우리 출판사가 발행한 책 가운데 여러 권을 그가 번역했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 삼총사는 지금도 연말이면 만나 송년을 함께 보내곤 한다. 하얀전쟁>
90년대 초반 안정효 씨와 함께 한 캐나다, 미국 여행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다. <하얀 전쟁> 이 라는 제목으로 미국 소호출판사에서 나오자 캐나다에서 그를 초청, 독서회를 가진 것이다. 하얀>
그 초청에 내가 동행했다. 나로서는 첫 해외 나들이라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뒤틀려 비자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그가 먼저 떠나고 내가 나중에 합류했다. 화물도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갔으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어렵게 그를 만났으나, 남자 둘이 호텔의 한방에 들어가는 우리를 그곳 사람들이 동성애자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고 우리는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실감했다. 독서회에서 안정효 씨가 30여분 낭독을 하자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는데 작가를 초청해 궁금한 것을 묻고 대답을 듣는 그들의 문화가 부러웠다.
미국의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숲 속에서 자급자족하면서 물질문명의 한계를 비판한 그 장소 즉 월든 호수를 간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뛴다. 고색 짙은 마을 콩코드를 지나 숲으로 오솔길을 걸어 들어가면 크지 않은 호수 가에 소로가 기거하던 토막 터가 있다.
그곳에서 소로처럼 길게 드러누워 보기도 했다. 월든 호수에서 나와 보스턴의 강에서 요트를 탄 기억도 색다르다. 줄을 서서 요트 타기를 기다렸는데 하필 우리를 맞은 것은 가장 고물이었다.
타고 싶지 않았지만, 함께 한 미국인 일행이 줄을 선 이상, 우리가 타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타야 한다며 배에 오르자고 했다. 작은 일 같지만, 자기에게 돌아온 게 좀 나쁘다고 해서 쉽게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들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수문출판사 대표ㆍ우이령보존회장ㆍ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동강위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