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PD는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바람처럼 돌아왔다. 내가 소년 시절에 보던 방송극 <똘똘이의 모험> 의 주인공 똘똘이 같은 얼굴이다. 똘똘이의>
그는 6㎜ 고화질 캠코더 하나를 들고 혼자서 국경과 국경을 넘어 ‘인간의 대지’를 달리는 개방 국제주의자다. 머리로 기획하고 카메라로 영상을 잡고 컴퓨터로 글쓰기와 편집을 해서 완성품을 만들어 텔레비전을 탄다.
김진혁은 1인 프로덕션의 선봉대이고, 비디오저널리스트의 선두마다. ‘김진혁공작소’는 ‘해외 프로그램 전문 프로덕션, 국제 컨텐츠 프로덕션’이라고 작업분야를 명기했다. 4인의 단출한 초소형 기업에 다작이다.
그가 지난 9년 동안 해외 현장을 뛰며 만들어낸 작품은 SBS 출발모닝와이드의 <김진혁 피디 리포트> 550편(10분짜리)과 다큐멘터리 15편(60분짜리) 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계약한 60분 다큐 <나는 로그인 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는 금년 8월에 완성할 예정이다. 나는> 김진혁>
●문자 텍스트와 영상물의 오버랩
나는 한 세대 선배인 내 모습을 그에게 중첩(오버랩)해 본다. 30여 년 전이다. 저널리즘의 리얼리즘을 하나의 주의(主義)로 삼으려고 노력하면서 성장하던 때, 나는 1975년부터 1979년 까지 4년 동안 해외취재 기사를 가장 집중적으로 연재한 기자였다.
한국일보의 전통적인 개방 국제주의 노선에 따라 볼펜과 스틸 자동카메라를 휴대하고 들락거린 나라는 20여 개국, 특파 취재기‘현장에서 본 남베트남의 최후’10회, 아프리카 10개국 일주기 ‘아프리카의 화맥’14회, 창간기념 특집‘한국일보 필진 세계를 가다’24회 등 모두 합쳐 75회를 연재한 기록이 있다.
당시 기획실장은 내가 한국일보에서 해외출장비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이라고 투덜댔다. 한국일보에서 가장 많이 썼다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쓴 것이 될 수 있다.
김진혁은 이른 나이에 MBC 프로덕션의 조연출, MBC 미술센터의 영화미술 프로듀서로 ‘조직’맛을 보았으나 싫증이 나서 제 발로 걸어 나온다. 조직생활 중 그가 얻은 것은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 디자인을 공부한 것이다.
김진혁이 잠재성을 처음으로 들어 낸 곳은 MBC에 <출발 비디오여행> 을 제작, 공급하는 프로덕션에 입사했을 때다. 영화광인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금방 티가 나 높은 인기를 누렸다. SBS 경력 PD 공채에 합격한 것은 2년 후인 1996년, 그러나 국제금융위기 사태로 감원바람이 불어 예능국에서 정리해고를 당한다. 출발>
1998년 1인 프로덕션‘김진혁 공작소’를 세우면서 그는 날렵한 기동력으로 세상을 누비기 시작한다. 김진혁 PD의 싱가포르리포트> 15부작은 김진혁 공작소가 SBS에서 수주하여 아침방송 출발모닝와이드에 낸 첫 벗 째 작품이다. 김진혁은 금융위기를 맞은 한국이 불황을 벗어나는데 배울 것이 있는 적격지로 세계경쟁력 1위 싱가포르를 지목했다.
“싱가포르에 가서 2주일간 1시간짜리 테이프 40개를 찍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생산력이지요. IMF 금융위기 직후 딸도 낳고 해서 헝그리 정신이 강하던 때였어요.”
그로부터 <김진혁 pd의 북극탐험> 7부작, <아마존에서 지구 끝 마을까지> 15부작, <순수의 땅 라오스> 12부작 그리고 4월19일부터 새로 방송하는 <김진혁 피디가 만나는 36번째 세상> 7부작 등 550편의 목록이 꼬리를 잇는다. 60분 특집 다큐멘터리는 <지구 끝 신비의 땅 볼리비아> 등 15편에 <메이드인 차이나의 비밀> (4월29일 방송예정)이 추가된다. 메이드인> 지구> 김진혁> 순수의> 아마존에서> 김진혁>
마흔세 살의 김진혁은 가장 많은 나라, 가장 긴 거리를 단시간에 오가고 가장 많은 작품을 텔레비전에 올린 1인 PD가 아닌가 한다.
●억척빼기 자조(自助)주의자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를 거치며 PD들은 직접 캠코더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이른바 ‘카메듀서(카메라+프로듀서)’의 등장이다. 그는 카메듀서로 전신하고 1인 프로덕션인 공작소를 세우고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자리를 매기는데 항상 남보다 한발씩 앞서나갔다.
그는 잘 논다. 놀 것은 심플하게 놀고 일할 것은 소처럼 일해서 사람이 선명했다. 연세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원 사회학과에 진학했지만 말만 잘 하는 학과 풍토를 내려다보는 유전자가 있었다. 그는 대학원 생활 중에도 퍼포먼스라든지 공연을 만들었다.
그는 따분한 것을 못 견디고 자기 일은 자기가 해내는 억척빼기다. 방송국 PD를 지망했지만 막상 자유를 갈망했다. 그는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해내려는 욕심이 있다. 그는 자기체질을 이렇게 소개한다. “몸 쓰는 것 좋아하고 머리 쓰는 것 싫어한다.” 행동적인 퍼스낼리티, 발로 뛰는 기자감각, 기획력과 글쓰기. 그는 몸소 해내고 스스로 돕는 자조(自助)주의자다.
“내가 너였다면? 네가 나였다면?”
오지를 여행하는 다큐 전문이 된 것은 영리하고 민첩하게 틈새시장을 찾아내는 그의 눈매와 거칠게 발로 뛰는 마라톤 맨 근성 때문인 듯 보인다.
나는 짧게 물었다. 그는 더 짧게 대답했다.
-김진혁 PD의 정체성은? PD, 카메듀서, 비디오저널리스트 중 어느 것이지요?
“기획하고, 연출하고, 찍고, 글 쓰고, 방송 출연하는 PD.”
-초기 방송조직 내의 방황기를 거쳐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전신하고 공작소를 차리기 까지 가장 중요한 모멘텀은?
“생활 그리고 다큐는 본인이 찍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
-김 PD를 여기까지 성장시킨 동력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
-몇 살까지 혼자서 현장을 뛰려 합니까. 뛰지 못하게 된 다음은 어떻게 자신을 성장시키겠습니까.
“카메라를 들 수 있을 때까지 뛰고 싶습니다. 카메라를 못 들게 되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방송용 프로를 제작하는 상업적 PD라고 자임했는데. 대상에 접근하면서 무엇에 초점을 맞춥니까. 무엇을 찾습니까.
“넌 어떻게 사니? 다른 시간 공간에 사는 너는 어떻게 사니? 내가 너였다면? 네가 나였다면? 이런 생각으로 세상 사람에게 다가가려 합니다.”
역시 그는 사회학도의 인문적 시각으로 렌즈를 조명한다. 그 속에 인류학적 상상력을 담아내서 그의 작품은 호평을 받는다.
모험, 앙리 기요메의 기억
-해외취재 중 겪은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로 가면서 난기류로 착륙할 때 비행기가 뒤집힐 뻔 했으나 몇 번 재시도 끝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불현듯 사이공 함락의 눈앞을 빠져 나오던 32년 전의 정황이 떠오른다. 현장의 맨 끝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는 저널리즘의 펜은 위기에 마주서고, 현장에 바싹 다가가야 직성이 풀리는 다큐의 카메라는 위험을 겪는다.
생텍쥐페리의 절친한 친구 앙리 기요메가 떠오른다. 우편 비행기를 조종하여 아르헨티나의 멘도사로 향하다 안데스 산맥 해발 3,000m에서 추락하여 조난한 기요메.
혹한 속 5일의 사투. 살아나온 기요메를 맞으러 비행해 간 생텍쥐페리와 얼싸안았을 때 그가 한 첫 마디는 인간 극기의 절정이다, “내가 한 일은 맹세컨대 어떤 동물도 할 수 없던 일일거야…”(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중)
'기분좋은 QX'가 제공하는 트렌드 ABC
●'다(多)형'자기성장
초현대사회의 특징중 하나는 많은 것을 한 번에 이행하는 동시다발성이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를 묶고 엮고 섞는 융ㆍ복합이 진행된다. 새로 부상하는 사업과 직종을 관찰하면 한사람이 여러 일을 하도록 요청하고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을 합쳐 혼종을 창조함을 본다.
여러 우물을 파는 것은 미덕이다. 이를 하나로 뚫는 퓨전형 지식인은 각광받는다. 한 사람이 여러 기술을 구사하는 멀티프로듀서,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공정을 다 해내는 '원맨프로덕션'을 보라. 이 시대는 만능인, 전인적 전문인을 원한다. 자기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사회는 기존에 없던 틈새를 찾고, 차별화를 위해서 다형 인간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 홈페이지 www.givenzoneqx.com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ann-bc@hanmail.net 사진 왕태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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