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버지니아 공대에서 거행된 희생자 추모식에서 미국 학생들이 보인 해맑은 마음이 한국사회에 감동을 주었다. 더러는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최악의 다중살상 참사를 겪은 학생들은 범인 조승희의 사악한 영혼을 무고하게 희생된 스승과 동료 32명의 넋과 함께 위로하고 천도(薦度)했다. 교정에 화강암 추모석 33개를 둥글게 놓고 풍선 33개를 하늘로 띄워보냈다. 조승희 추모석에도 성조기와 교기를 꽂고, 장미 카네이션 백합 꽃을 바쳤다.
● 용서와 화해 넘어선 반성
미국 젊은이들은 한국일보 특파원의 표현처럼, 가슴 뭉클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승희 영전에 놓은 애도의 글은 '용서와 화해'를 훌쩍 넘어섰다. 한 여학생은 "네가 그토록 절실했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마음 아팠다"고 적었다. 다른 여학생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또 한 남학생은 "너 같은 이를 만나면 손을 내미는 용기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죽은 자의 손을 잡았고, 세상이 서둘러 '살인마' 낙인을 찍은 조승희의 친구가 됐다.
이런 모습에 감동하는 것은 미국 젊은이들이 이처럼 인간과 인간성을 깊이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지녔을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한 때문이다. 또 우리 자신이 화(禍)를 입지 않을까 조바심하느라 참사를 직접 겪은 이들보다 편협한 감정과 생각에 얽매였던 탓이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는 애초 범인이 동포라는 사실에 경악하는 동시에 수치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수치심은 언뜻 자연스럽지만, 다른 누구보다 우리 자신을 먼저 걱정한 이기적 감정이다.
한국과 한국인의 체면과 이익을 다치고 미국사회의 질시와 보복에 시달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국가차원 사죄까지 거론한 것도 진정한 죄책감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없다. 이 위선의 허울을 이내 벗은 계기도 우리자신의 진솔한 반성이 아니라, "너희가 사죄할 일이 아니다"는 미국인들의 지적이었다.
이런 혼돈은 희대의 악행이 근본적으로 누구 탓이며, 어디에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는 논란에도 나타난다. 처음 우리사회는 뒤틀린 영혼의 증오와 광기가 낳은 재앙이라는 규정을 추종했다. 곧 이어 현실과 가상 세계에서 총기와 살상과 전쟁이 범람하는 미국사회의 폭력성, 폭력 문화가 되풀이되는 참사의 토양이라는 진단이 부각되자 솔깃해 했다.
그러나 미국을 병든 사회로 치부하고 총기소지 허용을 악의 근원으로 모는 것은 다중살상이 세상과 공존할 수 없는 사악한 영혼의 소행임을 왜곡한 정치적 음해라는 반론이 거세자 자못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처럼 논란의 갈피를 잡기 힘든 사정은 미국과 유럽 등의 다른 사회도 대체로 비슷하다. 다만 그들은 다양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모아, 다중살상 범행은 개인의 부적응 좌절 정신장애와 사회의 폭력성과 폭력에 대한 인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병리현상이라는 데 합의한다. 이를 바탕으로 버지니아 사건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유사 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 사회가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 진지하게 토론한다.
● 한국사회 '자폐 성향'드러내
우리사회는 조승희가 동포라는 사실에 집착했을 뿐 그가 파탄에 이르도록 겪었을 고통을 헤아리는 데 인색했다. 어릴 적부터 자폐 성향을 보였다는 그가 말부터 다른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얼마나 힘겹게 살았을지 진정한 동정심을 갖고 살피지 않았다.
한국사회에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그의 부모가 미국 이민을 택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마음은 또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사회에서 고립된 위험인물을 일찍 발견, 치유와 적응을 도와야 한다는 다중살상 범죄의 교훈에 크게 관심 기울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보면 이번 사건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세상의 고통과 불행 따위에 관심 갖거나 동정할 줄 모르는 자폐 성향을 드러낸 것은 우리사회, 우리 자신이다. 미국 젊은이들이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일깨워준 것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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