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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 사망/ 민주 투사 功… 빛바랜 失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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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 사망/ 민주 투사 功… 빛바랜 失政

입력
2007.04.23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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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19일, 소련 강경 보수파는 휴가 중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부부를 감금하고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로 구 소련 체제가 뿌리부터 흔들리자 위험을 느낀 보수파가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 소련 내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목숨을 걸고 올라갔다. 시민들은 그를 중심으로 인간 사슬을 만들어 쿠데타군에 맞섰고, 탱크 위에서 민주주의를 목 높여 외치던 그는 러시아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높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소련 개혁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이끌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러시아 ‘인민의 영웅’처럼 보였던 옐친 전 대통령은 99년까지 약 9년의 재임 기간 중 잇따른 실정과 지독한 부패로 극에 달한 인민의 불신을 안고 퇴임했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을 너무 서두르면서 러시아인들의 생활 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외교적으로도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다.

옐친은 30년 2월1일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 지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공업도시인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성장했다. 61년 공산당에 입당한 후 76년에는 스베르들로프스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됐으며, 81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에 올랐다.

그를 권력의 핵심으로 이끈 것은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의 친분이었다. 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옐친은 모스크바 당 제1서기와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됐으며, 90년 5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돼 ‘체제 내 야당’에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는 91년 발생한 쿠데타가 60시간 만에 실패로 끝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옐친은 소비에트 연방의 틀을 유지하려는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 해 12월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의 참여를 이끌어 내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고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민주화 및 시장경제 정책은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92년부터 실시된 가격자유화 정책으로 물가는 수천 배로 뛰었고 공기업 민영화 정책으로 인해 서민들은 기만 당한 반면, 거대한 부를 축적한 신흥 러시아 부호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민주화의 시계도 되돌렸다. 93년 보수로의 회귀를 요구하는 연방대표자회의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하고 헌법을 개정,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확보했다.

옐친은 10년 동안 9명이나 총리를 갈아치웠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오던 옐친의 민주화와 시장개혁 정책은 96년 대선을 기점으로 빛이 현격히 바래기 시작했다. 둘째 딸이자 크렘린궁 부실장인 타티야나 디야첸코와 올리가르키(과두재벌)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 이른바 ‘옐친 패밀리’를 중심으로 한 독단적인 정치행태로 국민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옐친의 말기 지지율은 2%까지 떨어졌다. 결국 99년 12월 건강 문제와 후진 양성 등을 이유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하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뒤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 났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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