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이모(53)씨는 요즘 남편만 보면 짜증이 쏟아진다.
대기업을 다니다 2년 전 퇴직한 남편(58)이 집에 들어 앉아 잔소리를 일삼기 때문이다. 이씨는 “예전엔 집안일에 관심도 없더니만 자꾸 간섭하고 시비를 걸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말했다.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주느라 외출도 힘들어졌다. 동창 모임이라도 나갈라치면 “점심밥 안 차려주고 어딜 쏘다니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남편이 은퇴하면 오순도순 노년을 보내려 했는데 현실은 딴판이에요. 다 늙어 ‘영감 시집살이’가 시작된 셈이죠.” 이씨는 정신과 상담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남편 때문에 병 생겨요
퇴직한 남편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주부들이 늘고 있다. 이른바 ‘은퇴 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다. 1991년 일본에서 처음 이름 붙인 이 증후군은 은퇴 남편을 돌보느라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져 정신적ㆍ신체적 이상이 나타나는 걸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신의학계 등이 본격적으로 이 증후군을 다루거나 크게 사회 문제화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기퇴직과 고령화 등과 맞물려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남궁기 연세대 의대(정신과) 교수는 “최근 2년 동안 이 같은 상담 사례가 2배 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정신과 의사들에 따르면 이 증후군의 증상은 다양하다. 우울증과 불안증, 불면증부터 소화불량, 위염, 두드러기를 비롯한 피부 발진 등 개인에 따라 증상이 다르다. 주부 윤모(55)씨는 “전에는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면 내 세상이었는데 이젠 온종일 남편 눈치나 보면서 하나하나 챙겨줘야 해 피곤하다”고 토로했다.
성장한 자녀들이 ‘고통’을 몰라주는 것도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박모(62ㆍ여)씨는 “아이들은 ‘아버지가 그 동안 고생하셨으니 이젠 어머니가 잘해 드려라’고만 말한다”며 섭섭해했다. 그 결과 ‘악처 콤플레스’도 생겨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과 달리 한국 주부들에겐 남편을 성가신 존재로 여기면 ‘내가 나쁜 아내인가’라는 죄책감까지 더해지는 특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황혼 이혼’으로 이어질 수도
정신과 의사들에 따르면 이 증후군은 스트레스에 의한 일종의 ‘홧병’이다. 수십 년 ‘남편 부재(不在)’생활에 익숙했던 주부들은 갑자기 이 리듬이 갑자기 깨지면 심리적 부적응 상태에 빠지게 된다.
생물학적 요인도 있다. 남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남성 호르몬이 퇴조하고 여성 호르몬 분비는 늘어난다. 한 정신과 의사는 “50대 이후에는 여성성 증대로 관심사도 다양해져 ‘남편 바가지’로 표출되곤 한다”며 “그러나 본인은 잔소리가 아니라 ‘가장이 맥을 짚어주는 것’으로 오인한다”고 설명했다.
남궁기 교수는 “한국의 남편들이 직장에 올인하면서 정작 아내와의 일대일 파트너십을 맺는 데에는 미숙해 발생하는 현상”이라며 “우리 사회는 서구보다 부부간 역할 분담이 확실해 그런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젊은 시절부터 취미생활 공유, 집안 일 분담 등 공동 훈련을 통해 친밀화 단계를 거쳐야 하다는 조언도 있다.
은퇴 남편 증후군은 또 ‘황혼 이혼’으로 이어져 말년에 가족이 해체될 위험성이 높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실제 황혼 이혼은 갈수록 늘고 있다. 통계청의 ‘2006년 이혼통계’에 따르면 전체 이혼율은 3년째 감소 추세지만 55세 이상 남성의 이혼은 전년보다 7.8% 증가한 1만2,900건으로 연령대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50~54세 남자(1만1,800건)도 7.3% 증가했다. 여자도 45세 이상에서만 10% 이상 이혼이 늘어났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55세 이상 이혼은 남자와 여자가 각각 3.5배, 5.1배 증가했다
한국여성개발원 변화순 여성정책전략센터 소장은 “노년기에는 자녀의 독립, 남편의 사회적 지위 감소와 같은 이혼 갈등 요인이 상당부분 제거되면서 이혼 희망률이 높아진다”며 “부부가 취미나 운동을 공유하는 등 변화된 상황을 받아들이고, 성 역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황혼의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이경진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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