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나의 경우 기자로 근무하던 1980년대 초 광주 학살 덕분에 언론사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 덕으로 공부를 해서 교수가 됐다. 이 점에서 내가 교수라는 현재의 직업을 빚지고 있는 사람은 엉뚱하게도 전두환이다.
어쨌든 광주의 피비린내를 뒤로 하고 유학을 간 곳은 텍사스 주립대학(오스틴)이었는데, 캠퍼스에 들어가 제일 먼저 놀란 것은 본부 건물의 엄청나게 높은 탑이었다.
그런데 오스틴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이는 기막힌 전망의 이 탑은 의아하게도 출입금지였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바로 이 탑에서 한 학생이 창문으로 총을 난사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 이후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 조승희도 미 총기제도 희생자
조승희라는 미국이민 1.5세대의 한국계 학생이 미국역사상 최대의 총기난사사건이라는 텍사스대학의 기록을 깨는 끔찍한 학살극을 저질렀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그러나 우리가 반문해야 하는 것은 미국에서 이 같은 대형 총기난사 사건이 주기적으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총기소유 규제와 같은 대책을 왜 마련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조씨와 같은 정신질환 소유자도 마음대로 총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번 사고와 같은 대형참사를 예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미국에서 정신질환자가 총기를 구입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면 조씨는 이번과 같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번 사건의 희생자만이 아니라 조씨 역시 미국의 총기제도의 희생자이다.
미국대학에서 미국정치는 누구나 들어야 하는 교양필수이다. 그리고 미국정치를 공부하면 누구나 접하게 되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대표하는 사례로 배우게 되는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 즉 미국 총기협회이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그리고 총기살인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이 총기규제를 주장해 왔지만 이 같은 노력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총기제조회사가 중심이 된 NRA의 막강한 로비 덕분이다. NRA는 1년에 1억 달러의 로비자금을 정치권에 뿌리는 워싱턴 최대의 큰 손 중 하나이다.
사실 이번 참사로 총기 규제의 필요성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또 다른 총기소유 옹호단체인 미국총기소지인협회(GOA)는 이번 사건이 엄청난 참사로 발전한 것은 대학 캠퍼스 내에서 총기소지가 허용되지 않아 방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기이한 논리를 펴며 오히려 총기 소지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정치학자들이 NRA에 주목하는 것은 NRA의 사례가 단순히 총기와 인명을 둘러싼 '살인의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주요 사안에서 다수 국민이 패배하는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맨커 올슨이라는 유명한 정치학자가 <집단행동의 논리> 라는 책에서 잘 지적했듯이 민주주의란 다수가 승리하고 다수의 이익이 관철되는 사회여야 하는데 집단행동의 논리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에 따르면 일반국민과 같은 다수는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하겠지"하는 식의 태도를 갖게 되고, 남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면 이에 편승하려는 '무임승차자'가 되려고 한다. 집단행동의>
반면에 총기 제조회사나 NRA와 같은 소수 이해당사자는 목숨을 걸고 수단방법을 다해서 로비를 하는 등 전력투구를 하기 때문에 다수 국민이 아니라 소수 이해당사자가 이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소수 당사자의 부정적 영향력
이번 대형참사를 보면서 우리는 그나마 총기 소유가 허용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정치에서도 소수 이해당사자의 로비에 의해 다수가 희생되는 한국판 NRA와 한국판 살인의 정치가 눈에 보이지 않게 매일매일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깨우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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