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가수 박광수를 기억하시는지? 영화감독 만화가 개그맨 이라면 몰라도 가수라…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 록 역사상 최고의 명곡인 신중현 곡 <아름다운 강산> 의 오리지널 가수라고 하면? 아름다운>
그렇다, 한국 블루스 음악의 개척자이자 대마초파동으로 금지된 명반 속에 유배되어 전설로 사라진 비운의 가수 박광수(67)씨다. 그가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신보 <아름다운 날들> 을 들고 돌아왔다. 34년만이다. 국내 대중가요 사상 전무후무한 최고령 독집 취입 기록이다. 아름다운>
화창한 봄날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서 만난 박광수씨는 “수 십 년 만에 음반 발표하고 인터뷰까지 하니 감개무량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노령이 믿기지 않는 다부진 체격이다. 동행한 제작자 김재욱씨는 “그간 박 선생님께 성인가요 음반을 내자는 제안은 많았으나 블루스 음악에 대한 고집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며 이번 음반제작이 쉽지 않았음을 털어놓았다.
박씨의 파란만장한 사연보따리를 풀어보자. 경북 포항에서 태어난 그에게 사업가이면서 UN군 정보국에도 근무했던 아버지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어린 그에게 당구 치는 법, 여자 고르는 법, 심지어는 성교육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개방적인 성품이었다. 자연 미국문화에 접할 기회도 많았다.
“집에 있던 제니스 라디오를 통해 중학교 때부터 AFKN을 들었어요. 새벽2시면 라는 프로에서 흘러나온 제목도 모르는 묘한 음악에 매일 밤을 샜습니다. 그게 흑인영가와 블루스입니다. 그때부터 가요는 노래로 생각하지도 않았죠.”
5.16혁명 때 부친의 신상문제로 집안이 쫄딱 망했다. 깡패나 폐인이 될 것 같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원입대를 했다. 제대 후 1962년 국민대 행정과에 입학했지만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자퇴를 하고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1년간 연기수업을 했다. 원로 탤런트 민지환이 그의 연기 동기생이다.
꿈은 원대했지만 끼니를 걱정했던 배고픈 시절이었다. 가수가 된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1964년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해 의정부의 하우스 캄보밴드에 들어갔다.
블루스를 노래하는 유일한 가수였던 박씨가 흑인병사들에게 인기가 대단하자 서울서 온 쇼 단장이 3배의 개런티로 그를 스카우트했다. 전국의 클럽을 돌던 패키지 쇼 가수가 된 그는 1년 후 한국흥행에 픽업되어 빅쇼 무대로 진출했다. “그때 황정태PD의 눈에 들어 TBC <쇼쇼쇼> 에 출연했습니다. 쇼쇼쇼>
발을 바닥에 비비고, 상체는 엇박자로 따로 노는 소울 춤을 추며 노래했는데 반응이 좋았지요.” 이후 1968년 영사운드, 1970년 김상희 스페셜 쇼, 1971년 록그룹 ‘비 블루’와 영 에이스를 거치면서 실력 있는 노래꾼으로 성장했다. 소문을 들은 신중현이 찾아와 팀 결성을 제안했다. 그가 최고의 그룹으로 평가받는 신중현 밴드 ‘더 맨’의 리드보컬이 될 때까지의 일이다.
신중현과 첫 음반 녹음이 한 창이던 1972년 10월 17일 군사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정권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첫 음반 <장현과 더 맨> 이 탄생했다. <아름다운 강산> 의 오리지널 버전이 수록된 명반이다. “이 노래는 원래 신중현씨가 통기타로 만든 곡인데 처음 노래한 무대는 청평 페스티벌입니다. 반응이 대단했죠. 저는 <잔디> 가 더 애착이 갑니다. 그 노래 때문에 대마초 사건 때 엄청 당했지만요.” 대마초의 경상도 은어인 <잔디> 는 묵직한 보컬과 남성적인 분위기로 주목 받았다. 잔디> 잔디> 아름다운> 장현과>
문제는 역시 <아름다운 강산> 이었다. 리더 신중현이 '박 대통령의 노래를 만들라'는 청와대 전화청탁을 거절한 후 멤버 모두 통제와 장발단속으로 시달렸다. 항의 표시로 박씨는 삭발을 하고 MBC 쇼프로에 출연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을 현란한 조명으로 조롱하며 감행한 18분에 걸친 <아름다운 강산> 연주는 일종의 음악 시위였다. 이후 이 음반은 퇴폐로 몰려 금지되었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이후 발표하는 음반마다 불운의 연속이었다. 1973년에 나온 첫 독집은 시작은 좋았다. 각 방송PD와 유명 DJ들이 서로 ‘매니저를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회사도 그를 주력가수로 밀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한 곡도 방송을 타지 못하고 음반은 또다시 금지됐다.
“기대가 컸는데 인간적인 배신을 겪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말하고 싶지 않네요.”
평생 블루스 창법으로만 노래한 가수이건만 방송금지의 이유는 황당하게도 ‘왜색 창법’이었다. 그 후 김희갑, 최용익 악단에서 활동을 했지만 음악에 회의가 들어 한동안 칩거했다. 결국 신중현과 더불어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활동금지가 되면서 그의 이름은 완벽하게 잊혀졌다.
1980년 서울의 봄. 박씨도 해금이 되었다. 작곡가 김희갑이 음반제작을 제안했다. 박씨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는 <검은 눈망울> 이란 노래가 있었는데 라이브 무대에서 남성적인 분위기로 이 노래를 부르면 신청이 끊이질 않았다. 이 곡은 후에 양희은이 불러 큰 인기를 얻은 <하얀 목련> 의 오리지널 곡이다. 그러나 김희갑씨와는 노래에 대한 견해차가 계속됐고 음반 제작은 결국 무산됐다. 하얀> 검은>
1981년 이번에는 사랑과 평화의 최희철씨 제안으로 어렵게 2번째 독집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작사 유니버샬이 제작이 끝나고 이틀 만에 문을 닫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이 음반도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발표한 세 장의 음반이 모두 사장된 비운의 가수. 총 4곡이 수록된 이번 싱글 앨범은 어쩌면 박씨의 진정한 데뷔음반일 수 도 있다.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 등을 작곡한 김정욱이 음악작업을 맡았다. 사랑이>
주목할 곡은 타이틀인 <아름다운 날들> 과 <장마> . 박씨의 묵직한 저음이 슬로우 템포에 얹혀 애틋함을 자아낸다. 박씨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음악을 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며 “음악인에게 은퇴란 없다. 나는 무대에서 공연하다가 죽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장마> 아름다운>
글.사진=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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