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된 고음악 스페셜리스트라도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긴 어렵다. 그 점에서 영국의 지휘자 겸 하프시코드 주자인 트레버 피노크(61)는 축복받은 재능을 지녔다.
지난 30년간 그가 녹음한 바로크 음악은 비평가나 일반 팬 모두에게 한결같은 찬사를 받아왔다. 최상급 해석이 아닌 경우라도 감상자의 귀를 배반한 기억은 찾기 힘들다.
18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린 피노크와 유러피언 브란덴부르크 앙상블의 공연은 지휘자의 미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날 피노크는 바흐와 헨델, 비발디와 퍼셀의 기악 합주곡을 프로그램으로 꺼냈다.
자신은 하프시코드에 앉은 채 독주와 지휘를 함께 맡았고, 단원들은 첼로 주자를 빼고는 모두 서서 2시간 동안 구슬땀을 흘렸다. 원전 연주에 익숙치 않은 애호가에겐 낯설게 보였을 터. 한참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울 강남 한복판에 구현한 바로크 궁정의 풍경이다.
프로그램의 중심은 역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두 편(1번, 5번)이었다. 피노크가 1980년대 초 잉글리시 콘소트를 지휘해 녹음한 음반이 ‘브란덴부르크’의 모범 답안으로 꼽히기에 팬들의 설렘을 더했을 듯하다. 악단이 바뀌었지만 악상의 쾌적함은 그대로였다. 한국에 오기 전 피노크는 “(과거에 비해) 바흐의 파괴적인 기질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진보적인 조형을 기대케 했다. 브란덴부르크>
하지만 피노크는 여전히 보수적인 스타일을 견지했다. 중용의 템포 속에서 독주부와 합주부의 농담(濃淡)과 세기를 정밀하게 조절하면서 악곡의 비경을 펼쳐보였다. 유럽 10여 개 나라에서 온 다국적 단원들은 씨줄과 날줄을 엮듯 화려한 음의 텍스트를 직조했다. 1번의 마지막 폴로네즈 악장에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총주의 율동은 시각적인 쾌감마저 주었다. 5번에서는 공연장의 크기 때문에 하프시코드 소리가 작게 들려 아쉬웠지만 그만큼 집중력을 높이기도 했다.
헨델의 <수상음악> 과 퍼셀의 <요정의 여왕> 모음곡도 감흥이 가득했다. 비발디의 터키풍 협주곡 <그로소 모굴> 은 ‘향신료’가 다소 부족했으나 발군의 솔로 카덴차는 큰 박수를 받을 만했다. 그로소> 요정의> 수상음악>
한국을 처음 방문한 피노크는 이날 프로그램 중간에 또렷이 “오늘 우리와 함께 음악을 즐기러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한국어 인사말을 남겼다. 쉬운 듯하지만 아무나 하지 않는 작은 노력은 음악의 감동을 더했다. 그리고 관객의 환호에 놀라는 이방인들의 표정에서 팬과 음악가의 ‘상호 교감’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재준ㆍ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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