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패션지 보그가 지난해 ‘영국을 빛낼 차세대 디자이너’로 선정한 인물은 영국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스티브 J(30ㆍ한국명 정혁서)와 요니 P(30ㆍ배승연)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주말 폐막한 2007 F/W 부산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을 통해 국내 첫 선을 보인 두 사람의 무대는 외국 언론의 열광이 허풍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기괴한 콧수염과 앙증맞은 모자를 쓴 채, 독특한 아우라를 내뿜는 듀오를 만났다.
“전에 런던 작업실로 한국 패션관계자가 찾아왔는데 저를 보더니 ‘어머, 진짜로 이러고 계시네요’ 해서 한바탕 웃었어요. 지금은 모자 안 쓰면 속옷 안 입은 것처럼 허전해요.”
패션쇼 직후 땀이 송송 맺힌 얼굴로 배승연씨가 깔깔 웃었다. 바늘에 실 가듯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파트너 정혁서씨가 “요니는 동네 마트에 갈 때도 모자부터 얹는 걸요”라며 거든다.
그 또한 동화 <피터팬> 의 후크선장을 연상시키는 콧수염에 헌팅캡을 썼다. 차림부터 눈길을 끄는 듀오는 요즘 영국에서 가장 뜨는 신예다. ‘미래의 패션 스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경쟁상대’ 등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대학(한성대 의상학과)까지 졸업한 ‘토종’들이 해외 언론을 열광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터팬>
“엄격한 브리티시 테일러링을 기본으로 하되 펑키한 요소를 가미해 옷을 상상력의 공간으로 채웁니다. 옷은 실용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입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산에서 첫 선을 보인 이들의 컬렉션 라인 ‘스티브 J & 요니 P’는 펑키와 테일러링의 경계를 절묘하게 조합, 해외 언론의 찬사를 수긍하게 만들었다. 티벳 지역의 이국적인 장식 문양과 색채감을 영국식의 절제된 테일러링에 녹여내고, 우리식 털신을 높이가 20cm는 족히 될 법한 플랫폼 힐에 앉혀내는 식의 믹스앤매치로 동서양인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최고급 울과 니트 소재로 하이패션의 품격을 살리되 재킷 앞단을 절개하고 허벅지부터 나팔처럼 퍼지며 풍성한 율동감을 살린 바지, 나무를 깎아 만든 기발한 모자 장식 등으로 스트리트 감성도 아우른다.
조규화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교수는 “소재와 색채감각, 스타일링 모두에서 풍부한 울림이 있는 컬렉션”이라며 “비비안 웨스트우드식의 고급스러운 펑키 감각을 높이 살 만 하다”고 평했다.
티벳문화에서 콘셉트를 가져 온 무대이지만 신인디자이너에게 매 시즌 여행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는 존 갈리아노 식의 풍부한 재원이 뒷받침될 리 없다. “신인들이 티벳 여행갈 돈이 어디 있겠어요?”라며 씩 웃는다. 대신 티벳 문화를 담은 여행화보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컬렉션에 대한 영감은 주로 책에서 얻어요. 콘셉트를 짜는 기간엔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죠. 우리는 런던의 도서관을 ‘보물창고’라고 불러요. 진귀한 고서부터 최신 아트북 까지 없는 게 없으니까요.”
듀오는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캠퍼스 커플로 만나 95년을 전후해 런던으로 유학, 각기 세인트마틴스쿨(정혁서)과 런던패션대학(배승연)에서 수학했다. 굳이 런던을 유학지로 선택한 것은 젊고 혁신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런던 스타일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막상 유학해보니 배우는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비슷해요. 다만, 런던이 좋은 이유는 신인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열린 마음을 갖췄다고 할까요? 능력만 있으면 큰 자본 없이도 자기 브랜드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린 시장 구조가 런던패션을 혁신적으로 만드는 힘이죠.”
정-배 커플도 그 열린 시장의 덕을 크게 봤다. 세인트마틴 사상 한국인 첫 수석졸업생인 정씨와 유명 여성브랜드 ‘키사’의 수석디자이너로 일했던 배씨의 경력을 높이 산 영국의 대표적 패스트패션 브랜드 ‘톱숍(Topshop)’이 듀오에게 콜래보레이션을 제의, ‘스티브 요니 스튜디오’ 라인을 런칭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늘 함께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 런던을 무대로 단 한번의 컬렉션을 마쳤을 뿐이지만 그 꿈을 향한 첫 발은 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지난해에는 제일모직이 운영하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 수혜자로 선정되는 영예도 얻었다.
“현재 런던과 파리, 모스크바에서 우리 옷이 팔리고 있어요. 앞으로는 뉴욕과 한국에도 진출할 수 있기를 기대하죠. 기업과의 협업은 디자이너와 기업 모두에게 윈윈 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 가능하면 더 많은 기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우리 옷을 선보이고 싶어요.”
패션쇼 직후 듀오는 부산의 생면부지 청소년들로부터 사인 공세를 받았다. 뜻밖의 유명세와 환대에 “어휴, 당황스럽네요” 한다. 지난 해 뉴욕컬렉션에서 활동하는 교포디자이너 리처드 차이가 부산컬렉션 직후 SK네트웍스와 전격 제휴를 맺은 것처럼 곧 ‘스티브 J &요니 P’와 기업간의 제휴 소식도 기다려볼 만 하겠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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