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가 버지니아공대 총기참사 범인인 조승희씨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과 관련한 국적ㆍ인종 문제에 대해 놀라운 자제력과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피해 당사자인 버지니아공대 커뮤니티와 대다수 언론 등이 나서 자칫 야기될 수 있는 국적ㆍ인종 갈등의 소지를 진화하면서, 포용을 통해 이번 사건을 화해와 단합의 계기로 승화하는 모습이다. 범인인 조씨에게까지 용서의 손길을 뻗치는 네티즌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버지니아공대 학생회는 18일 주미 한국대사관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한 사람의 행동이 우리 학생들과 한국민 간의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한국이) 알아주길 바란다”며 “이번 상황은 폭력을 극복하려는 열정을 공유한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단합케 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학생회는 특히 한국측이 추모집회에 쓰일 1만개의 초를 지원해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16일의 비극이 블랙스버그 너머 먼 곳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인식하는 가운데 우리와 슬픔을 같이 하려는 한국측의 메시지가 학생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학교측도 이날 아시아 출신 10여개국 학생대표 20여명과 간담회를 갖고 2,000명에 달하는 아시아계 재학생들의 신변안전 대책을 논의했다. 이에 따라 아시아 각국 학생 대표들은 앞으로 매일 학생들의 안전여부를 파악한 뒤 학생처장과 직ㆍ간접적으로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CNN과 NBC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 역시 희생자 추모, 범인의 정신상태나 행적, 대학당국 및 경찰의 늑장대처, 총기 관련 제도의 문제점 등 본질적인 문제에 보도의 초점을 두면서 국적이나 인종문제와 관련한 선정적 보도를 냉정하게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 미국 내 아시아 출신 언론인들의 모임인 ‘아시안 아메리칸 기자협회(AAJA)’는 이날 각 언론에 배포된 성명을 통해 “언론들이 이번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확실한 근거 없이 인종차별적 보도를 하지 말 것”을 강력 촉구했다.
2,000여명의 회원을 둔 AAJA는 성명에서 “지금까지 버지니아텍 사건과 관련해 범인이 인종적 문제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며 “인종 문제를 거론했을 때 파급될 악영향은 엄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CBS방송은 이날 대학 웹사이트인 ‘페이스북닷컴(Facebook.com) 등에서 ‘조씨를 용서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이 아직은 대부분 조씨와 이번 사건을 비난하는 것들이지만, ‘주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조승희(Eternal Rest Grant Unto Him, O Lord:Cho Seung-Hui)’란 제목의 대화방에는 50명 이상이 등록돼 있다고 전했다.
대화방을 개설한 여고생 맥켄지 스위가트(16)는 “나는 그 역시 인간이고, 다른 희생자들처럼 존중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재미 동포사회도 적극 부응하고 있다. 워싱턴한인회 대표단은 이날 오후 버지니아공대 대학본부 건물인 버러스홀 앞에 설치된 희생자 추모단에 헌화한 뒤, 양국 국민이 이번 상처를 극복하고 성숙한 동맹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도 이날 오후 워싱턴DC 인근 페어팩스카운티의 지도자들을 찾아가 지역 출신 학생들의 희생을 위로했다. 이에 대해 코넬리 군수 등 페어팩스 지도자들은 “이번 사건이 한인사회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되며, 이번 사태 충격을 다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뉴욕=장인철 특파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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