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의 명품점 아리랑 옆의 골동품 골목.
그는 체크무늬 ‘도리우찌’를 쓰고 얌전한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체크무늬 셔츠에 회색 계통 양복을 입었는데 넥타이 대신 매고 있는 목줄장식의 하회탈이 셔츠 깃 한가운데서 웃고 있다. 부조화한 앙상블이다.
그의 미소가 하회탈의 기묘한 표정과 대비된다. 시종 얼굴에서 생글생글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1934년생 문화계의 최고참치고는 매우 소년다운 미소, 165㎝의 저 키로 어떻게 하이킥 인생을 살고 있는지 감이 안 온다.
●편년체 인간
그는 편년체적으로 살아온 인간이다. 그가 내놓은 ‘이종인(李鍾仁) 자기소개서’는 줄이 쳐진 노트지 일곱 장에 지나온 칠십 여 년의 삶을 깨알 같은 손 글씨로 연대에 따라서 빽빽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종인의 이 편년체적 고지식함은 사유하는 인간 호모사피엔스의 한 면을 보여준다. 그는 줄곧 라일락 담배를 빼어 문다. 한창 때는 하루에 청자담배 세 갑을 피우고 커피 2,30잔을 마셨다. 주량은 소주 두 병으로, 놀기 좋아하는 인간 호모루덴스의 또 다른 면이 그에게 있다.
몸집이 작은 이 ‘사피엔스-루덴스 인간’은 알고 보면 새로운 문화지식 체계(문화행정)를 창출한 우리나라의 1세대 문화 게릴라다. 그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프리랜서 지식인으로 줄곧 살아왔다. 민간인으로서 문예진흥원이라는 정부의 특수법인체에 몸을 두었으나, 제도권 속의 재야 문화인처럼 일했다. 그리하여 문화행정의 중심점(스트롱홀드)을 ‘독립적’으로 구축했다.
존경받는 문화계의 어른이 부족한 터다. 지치지 않고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이종인의 삶은, 문화게릴라라는 초현대적 삶을 사는 신세대 후학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편년체 지식인의 서사적 인생은 이들에게 다른 교훈도 준다.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그의 인생도, 인고하면서 시간순서대로 쌓아나가는 고지식한 공부의 역사를 대가로 한다는 점이다.
●지치지 않고 거친 삶을
그는 제대와 동시에 첫 직장인 〈사상계〉사에 입사하여 장준하 사장 밑에서 6년 동안 잡지편집(편집부장 등)에 종사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당시 우리 사회의 각계 저명인사들을 만나는 기회도 얻었다.
〈사상계〉를 떠난 청년 이종인은 〈유한양행〉에 들어가 광고기획 업무를 맡아, 전공한 사회조사방법을 활용하여 체계적인 광고 거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남의 돈만 벌어줄게 아니라 내가 벌어보자는 욕심에서 1970년 광고와 편집업무를 대행하는 개인 사업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부도를 내서 집도 날리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전전긍긍 하던 때에 〈사상계〉시절의 인맥이 주선하여 문공부 홍보조사연구소 여론담당 전문위원으로 들어갔다.
“비판적 지식인 집단인〈사상계〉에서 일한 내가 정부기관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주저했다. 그러나‘어떻게든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주위의 권유에 다시 월급쟁이가 되었다. 빚은 1977년도 중반에 청산할 수 있었다.”
●제도권 속 문화 게릴라
이종인이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여 설립된 특수법인 문예진흥원(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74년. 문화예술계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업무가 시작되던 시점이다.
처음 맡은 업무는 현재도 발간되고 있는 월간지 〈문화예술〉〈문예연감〉을 창간하는 일이었다. 이어 〈문화예술총서〉13권,〈공연예술총서〉10권,〈문예진흥문고〉30권, 한국문학번역서 해외출판 등의 기획과 출판을 주도했다.
특히 지원국장 시절에는 문예진흥원의 지원행정체계를 정립하는데 주력하여 지원사업 공개공모 제도를 확립하고 심의제도를 개선했다. 초창기 진흥원 행정업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격으로 전례도 누구 물어볼 사람도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종인은 문화행정이 전무한 토양에서 스스로 공부해가면서 없던 틀을 새롭게 짜는‘신지식인’자리를 즐긴 듯하다. 그는 문화정책과 문화행정을 연구하는 지성적인 길을 일관되게 걸어온 노병 유목민이다. 재야와 제도권을 아울러 예술경영이나 문화기획을 하는 후배들에게 그는 걸어 다니는 문화행정의 야사(野史)로 통한다.
1993년 어느 날 밤, 종강파티를 마치고 종암동 연립주택으로 귀가하던 그는 2인조‘퍽치기’를 만나 가방을 강탈당한다. 〈문화행정과 문화정책〉을 출판할 자료(10년 간의 강의록) 전부를 잃게 된 것이다. 미개지를 개척해온 그의 값진 경험의 기록들이 문화행정사의 중요한 자료로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제자들의 수강노트를 복사하여 상실한 기록을 복원해가는 작업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문화를 보는 눈
당대인이 당대인의 작품을 선별 지원하는 게 쉬운 일인가. 문화는 독창성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당시대 상식으로는 소수파 반체제의 것일지라도 후세에 고전으로 남는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새로운 도전에 수반하기 쉬운 ‘실패’에 관대한 관리양식도 필요하다.
“여러분들은 본인 같은 1세대와 달리 어렵게 암중모색하던 시기에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행복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고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꼴통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장본인의 생각이다.”
이종인 연대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후진을 가르친다는 계획으로 한국의 문화정책에 관한 연구(1985년)로 석사학위를 받자 그 해부터 오늘까지 6개 대학을 돌아가며 문화정책과 지역문화를 강의한다. 문예진흥원 퇴임 후 내놓은 기획ㆍ공저는 〈한국의 지역축제〉, 〈한국의 향토문화자원〉(6권) 2권이다.
그 후 자기계발의 발판이 되는 사설연구소를 직접 만든다. 한국문화행정연구소라는 1인연구소를 10년째 운영해오면서, 문화예술 제도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프리랜서의 전통을 만들어 나간다.
현재 그의 나이 73세, 돌이켜보건대 사회활동을 시작한지 47년 가까운데 20대 후반부터 30대 말까지의 14년 동안은 희비가 엇갈리는 방황을 했다.
1974년 40대부터 오늘까지 33년 동안은 문화예술과 관련한 직업으로 살아왔다. 그는 문화예술인도 아니면서 문화예술을 이해해야 했고 관료출신의 행정가도 아니면서 행정을 알아야 했으며 최근에는 예술단체 경영인도 아니면서 문화예술경영을 논하기 위해 애쓰고 아직도 공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문화정책사를 정리할 때 그는 문화예술 지원제도를 만든 문화연구자 겸 문화기획자로 중요하게 언급될 것이 틀림없다. 유랑하듯 문화행정의 시를 짓는 김삿갓의 길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길이 좋아서 걷고 있다. 이 길을 들어서는 젊은이들을 대할 때마다 마치 문화전도사인양 용기와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 '기분좋은 QX'가 제공하는 트렌드 ABC
활동하는 사회고참의 대두
고령사회에는 60세 청소년, 70세 청년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노동세계에서 귀감이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은퇴인구는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니어 커뮤니티에 참여하여 사회봉사의 주도세력이 된다. 일부는 자신이 익혀온 전문기술을 임금과 상관없이 사회에 투입하는 볼런티어가 되는데, 이러한 '노련지식'이 지역공동체를 원활하게 운영하는 촉진제가 되는 사례는 많다.
이들은 어르신으로 모셔지는 고참권(시녀리티) 대신 사회공동체 속의 선배로서의 책임을 지게 된다. 한마디로 이들은'실버'나 '그레이'가 아니라 '우리들의 시니어'다. 가족이 아니라 지역과 사회조직 속에서 멘토와 코치로 활약하는 존재들이 수년 내에 급증할 것이다. 존경할 만한 사회적 어른이 없다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수많은 사회적 선배들이 대두하는 현상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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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ann-bc@hanmail.net사진 배우한 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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