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가 문화예술사에 제 이름을 들이미는 가장 소박한 형식은 그 도시에서 태어난 문화예술사적 재능을 통한 것이다. 제네바는 저술가 장-자크 루소와 소쉬르 가문의 여러 학자를 낳음으로써, 엑상프로방스는 화가 세잔을 낳음으로써,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는 철학자 칸트를 낳음으로써, 통영과 정주는 작곡가 윤이상과 시인 백석을 낳음으로써 문화예술사가 누락시킬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 얻어지는 문화사적 광휘가 찬란하기는 힘들다. 특정한 도시에서 뛰어난 재능들이 무더기로 태어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사적 광채가 휘황한 도시들은 그 휘황함을 그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보다는 그 도시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 더 크게 빚지고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렇듯 문화예술 활동도 비교적 동질적(同質的)인 장(場)에 터전을 마련한 동업자들끼리의 어울림과 경쟁과 상호 영향을 통해 생기를 얻게 마련이므로, 문화 자체의 논리에서든 정치사회적 이유에서든 이런 장을 품은 도시들엔 두드러진 문화예술사적 아우라가 입혀진다. 근대 이후의 서양 문화예술사에선 빈이나 파리나 뉴욕 같은 도시들이 그랬다. 이런 도시들은 대개 그 도시 이름을 딴 유파(스쿨)를 여럿 지니고 있다.
그런데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배출하지도 끌어 모으지도 않은 도시가 예술사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있다. 위대한 예술가가 그 도시를 제 작품의 무대로 삼은 경우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 아니었다면, 인구 20여만의 이탈리아 소도시 베로나가 문학사에서 거론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베로나는 1820년대 초 스페인 혁명에 대처하기 위한 반동적 국제회의가 열린 곳이고, 파올로 베로네제를 비롯한 15~16세기 화가들이 활동한 곳이며, 그 이전엔 <로미오와 줄리엣> 에 역사적 맥락을 부여한 교황당과 황제당 사이의 싸움이 치열했던 곳이다. 그러니까 정치사나 회화사에선 무명 도시가 아니다. 그러나 문학사의 지평에서, 이 도시의 이름은 오직 셰익스피어의 희곡 덕분에 일반인들의 귀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로미오와> 로미오와>
스페인의 세비야도 처지가 닮았다. 물론 세비야는 베로나보다 한결 큰 도시고, 게다가 벨라스케스라는 회화사의 거인을 낳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벨라스케스라는 이름에서 대뜸 세비야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젊은 시절 이래 궁정화가로 일하며 줄곧 마드리드에 살았기 때문이다. 정작 세비야라는 이름을 예술사에 들이민 사람은 이 도시의 아들 벨라스케스라기보다는 제 작품 속에 세비야를 끌어들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굴까? 우선 18세기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가 있다. 보마르셰는 자신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 와 그 속편 <피가로의 결혼> 의 무대를 세비야 둘레로 설정함으로써 이 도시를 문학사와 연극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두 작품은 꾀 많은 이발사 피가로가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알마비바 백작을 때로는 돕고 때로는 견제하며 벌이는 삽화들을 통해 수많은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그 덕분에, 당대 유럽의 문화적 정치적 중심이었던 파리의 관객들에게 남부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는 프랑스의 여느 도시만큼이나 친근하게 되었다. 피가로의> 세비야의>
그러나 이 연극에 반한 음악가들이 없었다면 세비야라는 이름이 공연예술사에 지금처럼 또렷한 글자로 적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비야라는 지명의 명성을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모차르트와 로시니가 보마르셰의 작품들에 홀딱 반했다. 이 두 위대한 음악가가 오페라로 만든 <피가로의 결혼> 과 <세비야의 이발사> 는 연극보다 훨씬 더 많은 관객을 매료시켰고, 이 오페라 작품들을 통해서 세비야의 명성은 온 누리에 퍼졌다. 세비야의> 피가로의>
연극 <피가로의 결혼> 이 오페라로 다시 태어나 세비야의 명성을 드높인 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2세의 공도 컸다. 파리에서 들려오는 입소문에 애가 탄 빈 시민들은 자기들 도시에서도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이 공연되길 고대했으나, 황제는 이 연극의 정치적 뉘앙스가 불온하다고 판단해 상연을 금지했다. 보마르셰가 이 작품에서 알마비바 백작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놓은 것은 당대 유럽 지배계급의 누추한 도덕을 겨눈 풍자이기도 했으니, 황제의 눈이 밝았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어리석은’ 신민들은 국경 너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 작품을 너무나 보고 싶어했고, 그래서 황제는 보마르셰의 작품 그대로는 상연을 금지하되 정치색을 완화해 오페라로 만든다면 상연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저 유명한 오페라부파가 탄생했다. 피가로의> 피가로의>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 역시, 비록 작품 제목에 세비야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세비야의 명성을 퍼뜨리는 데 이바지했다. 중편 <카르멘> 을 통해서다.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 돈 호세가 집시 여자 카르멘에게 홀리는 것이 세비야 담배공장의 위병으로 근무 像?때다. (이 담배공장 자리엔 지금 세비야 대학이 들어서 있다.) <세비야의 이발사> 와 <피가로의 결혼> 이 연극보다 오페라로 더 큰 명성을 얻었듯, <카르멘> 역시 메리메의 소설로보다 비제의 오페라를 통해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카르멘> 피가로의> 세비야의> 카르멘>
클래식 음악의 문외한들에게도 <피가로의 결혼> 이나 <카르멘> 의 몇몇 선율들은 익숙할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를 직접 보지 않고 중등학생 시절 음악 시간에 그 줄거리만 들은 사람들도 세비야라는 도시 이름을 뇌리 한 구석에 쟁여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 문학인들과 음악인들은 그 도시의 아들 벨라스케스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세비야라는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 셈이다. 카르멘> 피가로의>
보마르셰에서 비제에 이르는 이 예술가들은 세비야 사람이기는커녕 스페인 사람도 아니다. 이들 외국인이 세비야의 홍보대사 노릇을 한 것이다. 유럽 작가들이 이른 시기부터 제 작품의 무대로 제 나라만을 고집하지 않는 데는 정치적 이유도 있겠으나(이를테면 제 나라 군주나 지배계급을 직접 겨냥할 경우에 돌아올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라든지), 기독교 세계를 지배했던 보편주의의 영향도 그 못지않게 있는 듯하다. 한국문학 작품이 나라 바깥을 배경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일부 고전소설이 중국을 무대로 삼은 것을 제외하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세비야의 명성에 이바지한 외국인이 또 있다. 세비야 대성당 한켠에 그 유해가 안치돼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사내다. (이 자리에선 이 사람 개인에 대한, 또 그의 대서양 횡단 항해에서 비롯된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강점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괄호 안에 넣어두기로 하자.) 콜럼버스와 그 이후의 대항해 덕분에 세비야는 세계사적 명성을 얻었다. 기독교도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도를 완전히 몰아낸 15세기 말 이후 한 동안, 세비야는 서쪽 바닷길을 개척하려는 유럽인들이 위험한 항해에 몸을 던지던 출항지였다. 마젤란의 세계일주가 시작된 곳도 세비야였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이 남자를 부르는 사람은 이탈리아 바깥에서 찾기 어렵다. 그의 항해와 정복활동이 카스티야(당시 아라곤과 함께 스페인을 구성한 왕국.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지역) 여왕 이사벨1세의 지원으로, 다시 말해 스페인의 국가사업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합중국에서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 읽히고, 멕시코 이남의 중남미 지역 대부분에서는 스페인어식으로 크리스토발 콜론이라 읽힌다. 세비야 대성당에 묻혀있는 사람도 콜롬보나 콜럼버스가 아니라 콜론이다.
크리스토발 콜론의 유해는 본디 아바나의 한 성당에 안치돼 있다가 19세기 말 세비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비야 대성당은 그 규모가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크다. 이보다 더 큰 성당으로는 가톨릭교회의 본산인 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과 세계 최대의 성공회 성당인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 시대엔 세비야 대성당 자리에 모스크가 들어서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세비야를 되찾은 뒤 모스크를 부수고 거기 성당을 지은 것인데, 스페인의 성당들 가운덴 이런 식으로 세워진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래서 이 성당들에선 문득문득 그 옛날 이슬람의 기(氣)가, 그 영광과 슬픔이 느껍다.
세비야 대성당의 규모와 아름다움도 볼만하지만, 그 건너편의 알카사르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슬람시대에 만들어진 이 성채 안에는 기독교도의 재정복 뒤 호사스러운 궁전이 들어섰다.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 잔혹왕(El Cruel)이라 불렸던 페드로1세(재위 1350~1369)가 세운 것인데, 그 아름다움이 저 유명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 버금간다. 스타일도 군데군데 비슷하다. 그래서, 알람브라에서 놀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면, 그 전에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미리 김을 빼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세비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1929년 이베로-아메리카 박람회 회장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스페인광장이다. 아취(雅趣)가 그득한 반원형 건물 앞에 스페인 각주(各州)의 역사가 타일화로 묘사돼 있는데, 그 앞을 천천히 걷노라면 한 때 대서양을 내해(內海)로 거느렸던 해양제국의 역사가 상상 속에서 움찔거린다. 그 역사는 역겨운 역사이면서 웅장한 역사다.
시인과 변호사와 철학자와 나는 스페인광장에 차를 세워두고 시내를 가로질러 알카사르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고 나니, 스페인 광장으로 되돌아올 때는 다리에 힘이 빠져 마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과달키비르강에 이르렀을 때, 이 강을 여러 차례 노래한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가 생각났다. 그가 본 물이 바로 저 물일 터였다.
1993년 세비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그 도시의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그 전 해 거기서 엑스포가 열렸던 탓인지 값싼 호텔을 찾기 어려워 애를 먹기?했다. 10여 년 뒤 친구들과 함께한 두 번째 방문 때, 세비야는 나를 좀 더 살갑게 맞았다. 나는 친구들의 가이드였고, 친구들은 내 어설픈 스페인어에도 감탄을 연발했다. 아무리 어설픈 외국어도, 그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겐 그럴싸하게 들리는 법이다. 나는 한편으론 민망하면서도, 다른 편으론 떳떳했다. 적어도 내 스페인어는 그 옛날 교토(京都)에서 홍정선 형이 들려준 일본어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말라가의 숙소로 돌아오다 고속도로에서 길을 잘못들어 한참을 헤맸다. 밤 고속도로엔 우리밖에 없었다. 하늘을 총총히 수놓은 별들이 차창으로 쏟아질 듯했다. 우리는 길섶에 차를 세우고 나와 잠시 별 구경을 했다. 서울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스타리 스타리 나잇”(Starry, starry night)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돈 매클린이 거기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방인이었다.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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