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처럼 상업화 한 공간에선 여성친화, 가족친화형 설계가 많이 확산되고 있어요. 문제는 공공시설이죠.” “맞아요. 공원, 놀이터를 차도로 둘러싸인 자투리 땅이나 경사지에 배치해 공원(公園)이 공원(空園)으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아요.” “주민을 위한 편의시설이 오히려 우범지대화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인데, 주택가와 한강둔치를 연결하는 속칭 ‘토끼굴’도 그 중 하나에요. ‘토끼굴’ 주변 환경 개선 사업을 제안해 보면 어떨까요?”
7일 오전 경기 분당의 경화엔지니어링 회의실. 휴일도 반납하고 이른 아침부터 모인 ‘아줌마 건설인’들의 열띤 토론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늦은 점심 식사자리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건축, 도시설계, 교통, 조경, 토목 등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모임인 한국여성건설인협회(KOWSAE)의 간부들. 2002년 12월 발족한 여성건설인협회는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 만들기’를 중점과제로 채택해 연구하고, 한 해 두 차례씩 기획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의 여성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발간한 <여성친화도시-서울, 방향과 과제> 보고서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이를 정책적으로 구현할 구체적인 방안 마련을 의뢰 받았고, 여성가족부가 추진 중인 ‘가족친화형 마을’ 조성사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날 회의는 이 두 가지 사업의 기본 틀과 방향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첫 모임이었다. 여성친화도시-서울,>
여성 건설인들이 제안하는 ‘살기 좋은 도시’란 사회적 약자들이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공간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도시’이다.
굳이 ‘여성’을 키워드로 삼은 것은, 여성이 노인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이들 약자를 돌보면서 직업 활동도 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역할을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류전희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1930, 40년대 서구의 근대 도시계획 모형을 답습한 국내 도시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일터와 주거공간, 각종 편의공간이 분리돼 있다는 것”이라면서 “이런 환경은 전통적으로 집과 직장을 오가는 남성과 달리 동선이 길고 복잡한 여성에게 특히 불편하고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이원아 환경디자인 모자익 소장은 “‘남자들이 더 살기 힘들다’고 항변하는 등 ‘여성친화’ 개념을 편 가르기 혹은 역 성차별적 시각으로 보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면서 “여성친화도시는 여성‘만’ 살기
좋자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주축이 된 가족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밑바탕에 깐 인간 친화적 도시를 만들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시 환경과 문제점을 여성적 관점에서 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북미 여성운동가들이었다. 1981년 캐나다에서 시작된 ‘밤길 안전하게 다니기’ 캠페인이 그 예다.
초창기 안전성에 초점을 맞춘 캠페인에 국한됐던 이 같은 움직임은 이른바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을 선언하고 그 방안의 하나로 여성 문제에 주목한 1992년 리우환경선언을 계기로 더욱 주목 받게 됐다.
노르웨이 환경부는 지역공동체 정비계획에 여성의 시각을 적극 반영하는 내용을 매뉴얼(일명 ‘Cook Book’)로 만들어 시행하는 등 세계 각지에서 ‘여성친화’를 도시 설계의 바탕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김포시가 지난해 김포신도시를 여성친화도시로 조성키로 하고 여성가족부와 협의해 개발계획 전반에 대해 성별영향평가를 실시해 화제가 됐지만, 아직은 ‘여성친화’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일각에서는 불편하게 느낄 정도로 미흡한 수준이다.
선구자로서 여성 건설인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 그만큼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여성친화도시 만들기의 이론적 토대를 튼튼히 하기 위한 지속적인 연구작업은 물론,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이를 정책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실천 지침도 마련해야 한다.
지난해 <여성친화도시-서울, 방향과 과제> 연구 과정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도시 곳곳을 누벼야 했다. 전문 직업인이자 주부인 이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틈을 쪼개 당장 ‘돈 안 되는’ 이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데는 여성으로서 겪었던 뼈아픈 경험들이 깔려 있다. 여성친화도시-서울,>
“몇 해 전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넘게 휠체어 신세를 졌어요. 분당은 그래도 살기 좋다는 곳인데 지옥이 따로 없었어요. 그동안 건축 한다고 떠들고 다녔던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류전희 교수는 그 일을 계기로 친한 여성 교수, 건축가 등과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서 도시설계와 건축을 재조명해보는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도시설계를 전공한 김혜란 경화엔지니어링 상무도 “대학원 시절 환경감시 역할 등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배웠지만 그것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일하면서 가정을 갖게 된 이후였다”고 털어놓았다.
김정선 여성건설인협회 회장(크로스구조연구소기술사사무소 소장)은 “여자 화장실이 없는 건물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고 출산휴가 다 찾아먹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세대로, 협회를 통해 비로소 여성 문제에 눈을 떴다.
김 회장은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에 ‘여성친화도시’에 관심을 갖는 지방자치단체가 많이 늘고 있다”면서 “사회적 아젠다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 이제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기 위해 더 열심히 뛰겠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 공간마다 따로노는 서울
한국의 대표 도시 서울은 얼마나 ‘살기 힘든’ 도시일까. 휠체어 이동 체험까지 해볼 것도 없다.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공원에 나들이를 가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저상(底床) 버스가 늘었다지만 인도에서 멀찍이 떨어져 대기 일쑤다. 버스 안 통로도 좁아 유모차를 끌고 바로 승차할 수 없다. 자가용이 있어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차간 간격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주차장에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내리고 태우려면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한다.
어렵게 도착한 공원. 한 켠에 자리잡은 놀이터에는 파손된 놀이기구가 방치돼있어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외진 곳에 위치한 화장실은 그나마도 키 큰 나무들에 가려져 있어 날이 조금만 어둑해져도 혼자 드나 들기가 무섭다.
한국여성건설인협회 회원들이 지난해 구석구석 살펴본 서울의 도시 환경은 여성과 가족의 관점에서 볼 때 ‘낙제’에 가깝다. 공중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를 설치하고 지하철 역사에 젖먹이 아기를 위한 수유실을 갖추는 등 시설별로는 눈에 띄는 변화가 적지 않지만, 시설과 시설,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 요철 현상이 심하다.
관공서 담장을 허물어 산책길을 내면서 폭을 지나치게 좁게 만들어 유모차나 휠체어로는 다닐 수 없다든가, 문화공간으로 꾸민다고 걷고 싶은 거리에 설치한 조형물이 아이들의 놀이기구로 돌변해 안전사고를 유발하는 식이다.
공간을 설계할 때 실제 사람들의 생활을 면밀히 따져 반영하지 못한 결과이다. 도시 설계에 가정생활의 코디네이터이자 풍부한 일상의 경험자인 여성의 시각이 절실히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류전희 경기대 교수는 “개별 시설 차원에서는 환경친화, 여성친화, 범죄예방 등 각종 개념이 이미 도입돼있다”면서 “문제는 이를 잘 엮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해주는 연결고리가 끊겨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친화도시 건설이라고 해서 새 건물을 짓고 뜯어고치는 것처럼 거창한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면서 “장애인 주차공간을 늘려 어린 아이 딸린 여성 운전자들이 함께 쓸 수 있도록 하는 등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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