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열망과 전진, 좌절과 후퇴의 자취가 깊이 새겨져 있다. 역사적으로 개헌은 독재정치와 관련이 깊다.
그것은 독재자의 야망과 탐욕을 보장해 주는 선언이었으나, 민주를 갈망하는 세력에게는 허상을 부순 자유의 기념비였다. 큰 제스처로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지난 주까지 개헌논란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또한 논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개헌 체험을 먼저 알리고 싶은 까닭이다.
11월의 육군공병학교 밤 연병장은 싸늘했다. 연병장 바닥에 앉은 1,000여 명의 이등병 주위로 기간병, 장교들이 둘러섰다. 어둠 속에서 개헌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정훈교육이 실시됐다. 내무반 별로도 심리를 죄어오는 교육이 반복됐다. 생애 처음 국민투표를 했다.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려는 순간, 상사가 “내가 잘 접어 주겠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아니, 이리 줘라”는 실랑이가 오갔다.
●영욕 얼룩진 개헌의 역사
1972년 비상계엄 하에 치러진 유신헌법 투표였다. 그 날 저녁 중대장 호출을 받았다. 개헌에 반대하는 이유를 물어왔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없고, 대통령의 권한도 지나치게 강대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중대장의 심문이 한동안 계속됐다. 공병학교를 떠나올 때 상사가 넌지시 말했다. “박 이병, 기록은 계속 따라다닌다. 군대생활 잘 해라.” 그의 인간적 당부는 고마웠다.
2년쯤 뒤 상등병이 되어 다시 국민투표를 해야 했다. 반체제ㆍ민주 인사들이 유신헌법 철폐운동을 추진하려 하자, 정부가 선수를 쳐 찬반을 물은 것이다. “외출해서 투표하라”기에, 외출한 후 그냥 친구만 만나고 귀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고3이던 69년에도 ‘3선 개헌’을 해서 남다른 권력욕과 경제개발 야망을 드러낸 바 있다. 그 때 교우를 따라 교내 반대시위에 참가했으나, 시위는 휴교로 흐지부지되었다.
독재자의 유산인 유신헌법을 이용해서 무도한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도 합법적으로 국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박종철 이한열 등이 희생된 87년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쟁취되기에 이른다. 애써 쟁취하여 지금까지 유지되는 현행 헌법도 사실은 타협의 산물이다.
당시 국민적 요구는 4년 연임의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였다. 군부 세력은 대통령 단임제를 강력히 요구했고, 절충이 이루어져 5년 단임제로 굳어지게 되었다. 미완의 혁명은 미완의 헌법을 낳았다.
절충된 현행 헌법도 유신헌법만큼 절망감을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5년 단임이면, 장기집권의 폐해가 방지되고 단임 기간 중 소신 정치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신 4년 연임제가 된다면, 국민의 신임 여부를 존중하면서 책임 있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제안 후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많은 국민이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4년 연임제’에 대한 선호와 함께,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원 포인트 개헌’이 설득력을 얻었던 것 같다.
그러나 또한 많은 응답자들은 ‘개헌은 다음 정부에서 하는 것’을 지지했다. 정당들은 이런 여론에 밀려 차기 국회에서의 개헌을 약속했고, 대통령도 개헌에 대한 고집을 꺾었다.
●넘어야 할 현대사의 고비
정치권은 환영하고 있지만, 개헌 시기를 생각하면 개운치 않다. 기왕에 개헌해야 한다면, 언제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손실이 적은가. 계획과 포부가 많은 집권초기인가, 한창 정책을 펴고 있는 중반인가. 당연히 마무리를 해야 할 말기라고 생각된다.
과연 집권 마지막 해에 개헌을 주창함으로써 현 정부가 노리는 이득은 무엇일까. 실리보다는 명예나 명분일 것이다. 현 정부의 개헌 시도를 무조건 ‘정략적’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이야말로, 지나치게 정략적 발상이다. 미완에 그친 개헌논란은 아직은 정상적 혼란이고, 넘어야 할 현대사의 고비다.
논설위원실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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