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인터뷰 내내 사회적 타협을 강조했다.
성장이 중요하지만 사회적 타협이 없는 일방적 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박세일 교수의 선진화론(10일자 8면 인터뷰)만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며 재계ㆍ노동계ㆍ정부가 서로 양보하며 6차례나 사회협약을 만들어낸 아일랜드를 ‘참고모델’로 제시했다.
_김 교수께서 시대정신으로서 민주화의 종언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해방 이후 세 가지 시대정신이 있었습니다. 1945년부터 60년은 건국, 61년부터 87년은 산업화, 87년 이후는 민주화 시대가 진행됐습니다. 특히 2000년 낙선운동부터 2004년 탄핵사태까지가 민주화의 절정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시작됐습니다. 세계화가 민주화와 중첩돼서 전개된 것이지요. 생존을 위한 기업의 지속적인 구조조정, 노동계가 주장하는 850만 명의 비정규직, 고용 없는 성장 등은 민주화와 무관하게, 즉 세계화가 우리 사회에 던진 과제들입니다.”
_시대정신으로서 민주화의 종언을 민주화세력의 무능력, 나아가 보수 집권론으로 확대시키는 시각이 있습니다.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최장집 교수의 보수집권 수용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민주화세력 무능론에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민주화세력 집권기를 김영삼 정부부터 보는 시각도 있고 김대중 정부부터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군부개입 차단, 금융실명제, 남북정상회담,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 등 적지 않은 기여가 있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만 하더라도 빛과 그늘이 있습니다. 정치개혁이 그렇고 한미 FTA체결이나 균형발전정책은 부작용이 있겠지만 방향은 맞다고 봅니다.”
_무엇을 가장 잘못했다고 봅니까.
“시대흐름이 민주화에서 세계화로 변하는 데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1월 국정연설에서 사회적 양극화를 처음 언급했고 지난해 1월에는 한미FTA 체결방침을 밝혔습니다. 이런 과제들은 집권 초기부터 일관되게 제기했어야 했지요. 장기적인 전략과 로드맵이 취약했다고 볼 수 있지요.”
_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일맥상통하는데, 신자유주의 정책에 비판적이면서도 세계화에 적극 대처하는 게 어떤 것인지요. 결국 새로운 시대정신의 문제인 듯합니다.
“10일자 대담을 보니 박세일 교수께서 선진화를 언급했더군요. 제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지속가능한 세계화, 사회통합적 세계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보수가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나 좌파가 강조하는 반(反)세계화로서의 세계화는 둘 다 대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활력을 높이지만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_박 교수는 세계화를 해도 양극화가 심해지지 않은 나라가 많다는 주장입니다.
“세계화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양극화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지난 30년 동안 소득분배 구조는 악화됐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주장처럼 잘 사는 미국, 못 사는 미국 등 2개의 미국으로 나뉘어져서는 미래가 어둡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반세계화가 대안이 될 수 없지요. 우리의 내수시장 규모가 크지 않고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닌데 세계화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3의 비전인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_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요.
“두 가지입니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에다 새롭게 대외 개방과 대내 복지의 선순환을 결합시키는 이중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외국인이 상장사 주식의 40% 가까이를 갖고 있으며 외국인 근로자가 40만 명에 달하고 우리 기업의 해외투자가 어마어마한데 개방을 안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대신 개방의 충격을 대내 복지로 적극적으로 보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사람에 투자하자’는 이른바 사회투자국가를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중 선순환의 우리식 또는 한국적 표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모방의 모델이었습니다. 이제 모방에 의한 업그레이드는 어렵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선진국에 진입한 국가는 일본과 아일랜드 두 나라로 보는데 이들에게는 자기식 표준이 있었습니다.”
_한국적 표준을 조금 더 설명해주시지요.
“사회적 타협, 사회적 협약에 의한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말합니다.”
_재계와 노동계가 서로 양보하는 노사정 대타협을 말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덴마크 모델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발?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사회통합을 약화시킬 겁니다. 서울만 해도 강남, 강북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두 개의 한국’을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은 장기적으로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_그 점에서 ‘선(先)성장 후(後)분배’라는 우파의 주장과 차이가 있군요.
“성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상생의 타협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노조의 임금인상 자제가 있다면, 기업은 고용 안정성을 보장하고 정년을 연장해야 합니다. 세계화 시대에 어느 나라나 기업가 측 힘이 더 클 것입니다. 그 점을 어느 정도 승인하면서 타협 해보자는 것입니다. 아일랜드는 그 동안 6차에 걸친 협약을 이뤘습니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습니다. 한 두 번 하다가 안 된다고 중단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타협이 시도돼야 합니다.”
_공존의 철학을 강조한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연상시키는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럽 모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참고서이지 교과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_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적 지향점은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제가 노무현 대통령 취임연설 준비위원이었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가 조금 어색하지만 중도적 실용주의, 실용적 중도주의라 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_이념적 경향이 뚜렷하지 않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많이 썼고 교육, 주택 등 사회정책에서는 진보적이었습니다. 특징은 대단히 실용적입니다.”
_국가를 운영하는 대통령을 보수나 진보의 틀로 가두는 게 타당한지요. 진보세력이 ‘노무현의 변절’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편협하지 않은지요.
“국가 운영은 보수, 진보를 넘어서는 영역이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일관성입니다. 서로 배치되는 담론과 정책으로 지지그룹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_지속 가능한 진보 또는 중도진보를 내건 좋은정책포럼의 운영위원장을 맡으셨더군요. 중도는 현실적합성이 있지만 애매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나눌 때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국가와 시장이라는 세 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 활력이 시장에서 나오고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하면 안 되지만 신자유주의 논리처럼 최소 국가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아니면 누가 보호하겠습니까. 미국의 클린턴 정부, 영국의 블레어 정부, 독일 대연정도 크게 보면 새로운 중도개혁 노선으로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가 크다고 봅니다.”
_그런 관점에서 이번 대선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번 대선은 노무현 정부 5년을 포함해 중도개혁정부 10년에 대한 평가의 의미도 있고 우리사회의 미래 비전에 대한 선택의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국민의 열망은 성장동력의 가속 페달을 다시 밟을 수 있는 부국(富國) 열망,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상생 열망, 그리고 남북한의 공존을 실현할 수 있는 평화 열망 등 3가지로 봅니다. 현재는 부국 열망이 가장 크고, 이것이 한나라당 대세론의 배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의 부국 패러다임과 차별되는 새 패러다임이 나온다면 접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_반(反)한나당 연합이 가능할까요.
“시민사회 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인데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손학규 전 지사, 정치권 밖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문국현 사장 등이 선거연합을 이뤄 한나라당과는 다른 비전, 국가전략 및 정책을 제시한다면 흥미로운 경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이 아주 중요합니다.”
●김호기 교수는
중도적 진보주의자이자 대표적인 시민사회론자다. 분배를 중시하면서도 성장을 간과하지 않고 시민사회에 무게중심을 두면서도 기업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유연한 학자다.
1990년대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국가, 시민사회, 민주주의> 를 발표, 시민사회론에 불을 붙였다. 이 달 말에는 시민사회론을 결산한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과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제시한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 을 출간한다. 세계화> 한국> 현대>
김 교수는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다. 1994년 참여연대 창립에 참여해 협동사무처장, 정책위원장으로 일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연설 준비위원을 맡았다. 논리적 언변과 글 솜씨로 신문과 방송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좋은정책포럼 운영위원장을 맡아 민간싱크탱크 수립에 적극 관여하고 있다.
1960년 경기도 양주생
연섦?사회학과, 동 대학원, 독일 빌레펠트대 박사
1992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1995 한국사회학회 총무
1999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
2002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2003 노무현 대통령 취임연설 준비위원, 정책기획위 위원
2006 미국 UCLA 한국학센터 방문학자
현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좋은정책포럼 운영위원장
저서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말 권력 지식인> 말> 한국의>
인터뷰=이영성 편집위원 leeys@hk.co.kr사진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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