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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피싱' 지능화…눈뜨고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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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피싱' 지능화…눈뜨고도 당한다

입력
2007.04.16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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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들을 납치했다.”

14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사는 A(45ㆍ여)씨의 집에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협박범은 “아들을 납치해 건물 신축공사장에 데리고 있으니 살리고 싶으면 돈을 송금하라”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A씨는 범인이 지정한 계좌로 허겁지겁 1,000만원을 송금했다.

비슷한 시각 A씨의 아들(17)은 학원에서 괴전화에 시달렸다. 전화를 받으면 상대방은 아무 말 없거나 욕설을 해대고 전화를 끊기를 반복했다. 이런 통화가 세 차례나 이어지다 아들은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얼마 후 A씨는 수업을 마친 아들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금 환급에서 납치ㆍ협박으로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ㆍ전화금융사기)’ 수법이 진화하고 있다. 검찰과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사칭해 세금 및 보험료를 환급해 주겠다며 접근하던 종전 방식에서 벗어나 자녀 납치ㆍ협박을 빙자한 형태로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범죄 조직이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계좌이체를 통해 돈을 가로채는 수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잘 먹혀 들지 않자 개인 신상정보를 대량으로 입수해 범행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24일에도 대구의 B씨가 “아들이 사채를 갚지 않아 납치했는데 돈을 보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허위 전화에 속아 600만원을 사기 당했다. B씨의 아들 역시 발신자번호 표시가 뜨지 않는 전화를 1시간 넘게 받았고, 아들과 연락이 끊긴 B씨는 속수무책으로 돈을 부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달 27일 부산에서는 이 같은 ‘보이스 피싱’ 수법으로 협박전화를 걸어 1억4,000여만원을 뜯어낸 일당이 구속됐다. 실제 사기 피해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납치를 가장한 협박 전화 신고도 전국적으로 끊이지 않고 있다.

●치밀한 사전준비

조사결과, 범죄 조직은 범행 대상의 연락처, 주소 등 개인 정보를 모두 알아낸 뒤 부모와 자녀에게 동시에 전화를 거는 수법을 썼다. 부모에게 거짓으로 녹음된 자녀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 자녀에게는 수 차례 전화를 걸어 전원을 끊게 만들거나 부모와의 통화를 방해했다.

설령 부모가 자녀와 통화를 시도해도 전원이 꺼져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납치된 것으로 믿고 불안한 마음에 돈을 보낼 수밖에 없는 심리를 이용했다. A씨의 경우에도 범인은 외부와의 연락을 막기 위해 40분 간 통화를 이끌었다.

철저한 역할 분담도 특징이다. 중국이나 대만 등 대부분 중국계 폭력 조직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현지에 콜센터를 차려놓고 한국어에 익숙한 중국동포 등을 고용해 국내로 전화를 걸게 하고, 계좌 개설이나 송금은 조직과 연계된 국내 조직이 담당한다.

1월 납치 사기로 경찰에 붙잡힌 대만인 일당도 중국과 한국에 총책과 중간관리책 등을 두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또 ‘030’‘086’ 등 여러 개의 발신지 고유번호를 사용해 수사에 혼선을 주는 한편, 외국 통신교환기를 여러 차례 경유해 추적을 따돌리기도 한다.

●왜 끊이지 않나

지난해 6월부터 올해 3월까지 발생한 피싱 사건은 2,406건으로 이 중 미해결 사건이 1,409건(58.6%)에 달한다. 범인 검거율이 절반을 밑돈다. 납치ㆍ협박과 관련한 정확한 피해 수치는 없다. 경찰에 따르면 올해 1월까지 매달 평균 200여건에 머물던 피싱 사건이 최근에는 두배인 400여건으로 급증했다. 경찰은 납치를 가장한 피싱 사건이 증가하면서 전체 건수도 대폭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외국 범죄 조직이 한국을 주된 표적으로 삼는 이유에 대해 허술한 금융시스템을 지적한다. 여권만 있으면 외국인도 얼마든지 계좌를 개설할 수 있어 이들이 위조 여권을 대량으로 만들어 사기에 이용한다면 사실상 추적이 불가능하다. 국내 금융기관의 1일 1회 이체 한도가 고액(최고 1,000만원)이라는 점도 범죄 단체에는 매력적이다.

연락처와 집 주소 등이 담긴 상세한 개인 정보가 이들에게 쉽게 흘러 들어갈 정도로 취약한 보안 의식도 범죄를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경찰 관계자는 “납치 전화사기의 주범 대부분이 외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어 검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관련 국가와의 국제 공조수사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문제점이 드러난 금융 및 외국인 관리체계에 대한 개선을 정부에 요청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

'피싱'은 개인정보(Private data)와 낚시(Fishing)를 합성한 신조어다. 신용카드와 주민등록번호 등의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알아내 범죄에 이용하는 신종 사기 수법을 뜻한다. 보이스(Voiceㆍ음성) 피싱은 전화를 이용한 사기를 일컫는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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